강준만의 칼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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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페미니즘: 한국 페미니즘 논쟁사, 2008~2018

  • 관리자 (inmul)
  • 2018-07-12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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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전쟁’이 된 페미니즘 논쟁
지난 20여 년간 페미니즘 논쟁과 논란이 뜨겁게 벌어졌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너무도 뜨거운 싸움인지라, ‘전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나름의 생각이 있어도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다. 확실하게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으면 양쪽 모두에게서 욕을 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불가능한가?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소통의 관점에서 짚을 건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 이 전쟁을 유심히 지켜본 나로서는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맥락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한쪽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의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배경과 맥락을 중시하는 반면, 반대편은 그런 배경과 맥락은 무시한 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금, 여기의 팩트’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전쟁은 정면충돌하는 무력전으로만 나아갈 뿐, 갈등 해소의 출구를 영영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금, 여기의 팩트’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심성을 갖게 만든 역사적 배경과 맥락이 없을 리 없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쪽의 소통을 위해 양쪽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따져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간의 논쟁과 논란을 역사적으로 기술하고 분석함으로써 그런 소통에 기여하고자 한다.

왜 여성학은 수요가 없어졌는가?
“페미니스트로 살기 힘들지 않으세요?” 김신명숙은 어쩌다 인터뷰 같은 걸 하게 되면 거의 항상 듣게 되는 질문이라며, “이 질문을 통해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가 낙인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고 말한다.1
사실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페미니스트’가 낙인이 아닌 적은 없었다. 낙인화의 강도는 여성 운동의 강도와 정비례하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여성이 죽은 듯이 잠자코 있으면 그런 낙인화가 필요가 없을 터인즉, 여성 운동이 활발해질수록 낙인화도 강하게 이루어져온 것이다.
김신명숙이 이 말을 한 시점은 2009년이다. 1999년 군 가산점제 폐지, 2001년 여성부 출범, 2005년 호주제 폐지 등을 비롯하여 그간 여성 운동이 많은 성과를 보여온 덕분에 2000년대 후반 들어 낙인화 시도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1998년 IMF 사태 이후 강화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 체제하에서 남성성이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이 여성 운동에 대한 그런 반감의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남성들의 반격(backlash)이 워낙 거센 탓이었을까? 2000년대 중반부터 여성 운동이 위축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IF)』가 폐간되는 등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를 전면에 내건 활동이나 단체들이 급속하게 사라져갔다. 2007년 숙명여대에서는 협동 과정으로 10년간 존재했던 여성학과가 ‘철거’ 선고를 받았는데, 대학 측에서 밝힌 이유는 “여성학은 이제 수요가 없다”는 것이었다.2
여성학은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는 뜻이었을까? 당시 상황은 최악의 취업난이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2006년 취업 시장엔 ‘삼일절’, ‘십오야’, ‘이구백’, ‘십장생’ 등의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삼일절’은 31세면 취업길이 막혀 절망한다, ‘십오야’는 15세만 되면 앞이 캄캄해진다, ‘이구백’은 20대 90퍼센트는 백수, ‘십장생’은 10대들도 장차 백수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3
2006년 10월 1일 치러진 서울시 공무원 932명을 뽑는 시험에 15만 명이 지원함으로써 그런 신조어들이 결코 ‘말장난’만은 아니라는 걸 실감케 했다. 932명을 뽑는 시험에 감독관이 1만 5,000명, 시험장이 143개 학교, 시험 관리 비용이 무려 18억여 원에 달했다. 심지어 지방에서 상경하는 응시생을 위해 KTX 임시 열차가 배정되었고, 시험날이 일요일임에도 일부 교통 문제가 빚어졌다. 중앙선관위 9급 공무원 공채의 경쟁률은 무려 1,997대 1에 이르러, 경쟁률이 거의 ‘로또’ 수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4
2006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비정규직 비중은 35.5퍼센트(545만 7,000명, 정부 발표)~55퍼센트(845만 명, 노동계 발표)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비정규직 근로자는 전년에 비해 24만 6,000명 늘어난 570만 3,000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35.9퍼센트에 이르렀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126만 6,000원으로 정규직 임금 200만 8,000원의 63.5퍼센트에 불과했고, 퇴직금과 상여금, 유급휴가 등 근무 환경에서도 큰 격차를 나타냈다. 월 100만 원 미만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의 63.1퍼센트가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3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5

‘88만원 세대’의 탄생
취업은커녕 취업 경쟁의 기회마저 얻지 못하는 지방대 학생들은 ‘피맺힌 절규’를 하고 나섰다. 이른바 ‘헌혈 시위’였다. 한남대학교 총학생회는 2007년 3월 20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교내에서 전교생 1만 5,000여 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헌혈 캠페인을 벌이면서 작성한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0번이 넘게 이력서를 쓰고도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단과대학 수석을 하고도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지방대학 출신이고 또 여자라는 이유로 낙방에 낙방을 거듭합니다. 4년 뒤에도 사정이 지금과 같을까요?” “앞으로 있는 힘을 다해 공부하겠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 해외 연수도 다녀오겠습니다. 일자리를 주십시오! 저희는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이 피를 나라에 바칩니다. 그러니 이 숭고한 피를 받으시고 피땀 흘려 일할 일터를 주십시오.”6
2007년 7월 1일 시행된 비정규직법은 비정규직을 위한다고 만든 법이지만,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화한다”는 법 조항이 기업들로 하여금 비정규직을 대량 해고하게 만드는 사태를 낳았다. 2007년엔 근로자 300명 이상 기업이 비정규직법 적용을 받지만, 100명 미만 기업까지 확대되는 2009년엔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2007년 8월 우석훈과 박권일은 『88만원 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출간해 ‘88만원 세대’를 2007년 최고의 신조어로 만들었다. 이들은 취직도 어렵지만 취직에 성공한 20대도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라며 우리나라 비정규직 20대의 월 평균 급여가 ‘88만 원’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20대의 상위 5퍼센트만이 5급 공무원이나 대기업·공기업 등의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고 나머지 95퍼센트는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의 평균 월 임금인 119만 원에 성인들에 대한 20대의 평균 임금의 비율인 74퍼센트를 곱하면 이들의 월 평균 임금은 88만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7
‘88만원 세대’ 외에도 2007년 한 해 동안 수많은 신조어가 나타났다. 30대 절반이 백수라는 뜻의 ‘삼태백’, 취업을 위해 어학 연수나 유학을 떠난 학생들을 가리키는 ‘영어 난민’, 온라인 입사 전형에 수만 명의 지원자가 몰려 시스템이 다운된 사례를 꼬집은 ‘서버 전형’, 고시족과 공시족(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구직자)이 결합된 ‘고공족(考公族)’, 취업을 위해 명문대로 편입하려는 ‘메뚜기 대학생’, 취업 뒤에도 습관적으로 구직 활동을 계속하는 ‘구직 중독증’, 재취업을 위해 몰래 공부하는 ‘도둑 공부’ 등 신조어엔 끝이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때마다 등장한 ‘조기(조기퇴직)’, ‘명태(명예퇴직)’, ‘황태(황당하게 퇴직)’ 등의 생선 시리즈는 ‘동태족(한겨울에 명퇴한 사람)’, ‘알밴 명태족(퇴직금을 두둑이 받은 명예퇴직자)’, ‘생태족(해고 대신 타 부서로 전출된 사람)’ 등 파생 용어들을 낳았다.8
취업난이 양산해낸 신조어 열풍은 대학 내부로까지 파고들어갔다. ‘장미족(장기간 미취업 졸업생)’, ‘칩거족(학교 수업 이외의 나머지 시간을 방에서 혼자 지내는 학생들)’, ‘나홀로족(공부나 취미 생활, 쇼핑, 식사 등 무엇이든 혼자 하는 학생들로,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와는 다른 개념)’, 쉬는 것이 두려워 취업 준비에 매달리는 ‘공휴족(恐休族)’, 학점 따기가 수월한 타 대학이나 취업 시 이력에 도움이 되는 해외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학점 쇼핑족’까지 나왔다.
특히 기업의 면접 전형이 강화되면서 이색 스터디 그룹이 속속 등장했다. 기업체에서 합숙 면접이 유행하면서 이에 대비한 MT 스터디가 새로 생겼다. 또 ‘개인기’를 위한 노래 스터디나 마술 스터디도 인기를 끌었지만, 특히 ‘모욕 스터디’가 눈길을 끌었다. 면접에 대비해 말실수나 신체적 약점을 집요하게 꼬집어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공격적인 질문을 앞세워 면접생의 ‘내성’을 키우기 위해서였다.9
진학이나 취직을 하지 않으면서 직업 훈련조차 받지 않는 15~34세의 젊은 층으로 실업자와 달리 일자리를 구할 의욕이 없는 니트족(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또는 ‘청년 무업자(無業者)’는 2007년 말 15~34세 전체 인구 1,475만 9,193명 가운데 95만 1,851명(6.9퍼센트)으로 실업자의 2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니트족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경기 불황과 과잉 학력 등을 주된 이유로 꼽았지만,10 어쩌면 나름의 터득한 ‘체념의 지혜’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모든 우울한 풍경은 통계청의 ‘2007년 사망 및 사망 원인 통계 결과’로 집약되는 듯했다. 한국의 자살률이 10년 새 갑절로 뛰어 최고치를 나타냈는데, 하루 33.4명꼴로 목숨을 끊었고 특히 한창 일할 나이인 20대의 자살은 1년 새 50퍼센트 가까이 늘었다. 한국인의 사망 원인은 암(27.6퍼센트), 뇌혈관 질환(12.0퍼센트), 심장 질환(8.8퍼센트), 자살(5.0퍼센트), 당뇨병(4.6퍼센트), 교통사고(3.1퍼센트), 호흡기 계통 질환인 만성 하기도 질환(3.1퍼센트), 간 질환(3.0퍼센트), 고혈압 질환(2.2퍼센트), 폐렴(1.9퍼센트) 순이었지만, 연령별로 보면 10대 이하는 교통사고가, 20대와 30대는 자살이, 40대 이상은 암이 각각 사망 원인 1위였다.11
우석훈과 박권일은 “20대를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너무도 무능해 뭘 만들기는커녕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를 예상한 듯, 그들은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주장했지만,12 젊은 남성들의 분노는 정부와 정치권을 향하기보다는 개인 영역에서 잠재적 경쟁자인 여성을 향하는 듯 보였다.

일베의 탄생과 청소년의 페미니즘 혐오
2008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 10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 여성계는 여성 운동의 침체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는 “공동체에 뿌리를 둔 제3세계 페미니즘보다는 ‘여성의 사적 권리’ 쟁취에 주력한 화이트 페미니즘을 쫓아간 것이 오늘의 위기를 부른 게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남성을 ‘여성의 적’으로 전제하고, ‘여성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투지로 밀어붙였던 것도 남성에겐 역소외감을, 여성들에겐 피로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13
2008년 10월 송준호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처럼 거센 반감을 사고 있는 용어도 드물다”고 했다. “지난 10여 년간 페미니즘 진영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온 마초(남성 우월주의자)들은 결국 이들을 ‘꼴통 페미’라고 명명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꼴통 페미’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페미니스트들의 막강한 ‘공격력’에 대한 마초 남성들의 무력감도 함께 담겨 있다.”14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2010년 극우 성향의 혐오 전문 인터넷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탄생과 활약은 페미니즘 혐오를 10대들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가족부가 2011년 청소년 유해 가요 지정, 인터넷 게임 셧 다운제를 발표한 것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황정미가 잘 지적했듯이, “청소년 문화와 인터넷 게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가족부는 남성 네티즌, 특히 청년과 청소년 남성들의 공적이 되었다. 안티 페미니즘 정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에 대한 분노와 여성가족부에 대한 비난을 결합시켰다.”15
2013년 6월 2일 일본의 넷우익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을 추적한 르포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서울에서 열린 출간 기념 공개 대담에서 박권일과 양국의 넷우익 현상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일본 넷우익에도 여성 혐오 현상이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재일조선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에 대한 혐오 발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다.” 박권일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극우 담론을 보더라도 자국의 젊은 여성에 대한 혐오가 한국만큼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여성 혐오는 한국 넷우익의 ‘종특’(종족특성)인가?”16
그게 ‘종특’이라면, 그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병역의무제의 탓이 컸으리라. 남성에게 유일한 보상인 군 가산점제 폐지에 분노해온 남성연대 대표 성재기가 2013년 7월 25일 남성연대 홈페이지에 “성재기, 내일 한강에 투신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것도 그런 특수성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성재기, 내일 한강에 투신하겠습니다”
성재기는 여성은 군 복무 면제, 각종 할당제, 여성 전용 시설, 생리휴가 등의 제도를 통해 과도한 특혜와 배려를 누리는 반면 남성은 역차별당한다고 주장하면서 2008년 남성연대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간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파산이 코앞에 임박하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린 것이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이제 저는 한강으로 투신하려 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십시일반으로 저희에게 1억을 빌려주십시오. 만약 제가 무사하다면, 다시 얻은 목숨으로 죽을힘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빌려주신 돈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부디 엎드려 간청합니다.”
다음 날인 7월 26일, 성재기는 동료들이 찍는 카메라를 향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마포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렸다. 사설 구조요원을 섭외해둔 일종의 ‘기획 퍼포먼스’였으며, 남성연대는 그날 저녁 지지자들과 ‘불고기 파티’를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성재기는 강물에 빠진 후 돌아오지 못한 채 투신 나흘째인 7월 29일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분노는 여성을 향했고, 그 여파로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는 접속자가 폭주해 다운되었다. 『시사IN』은 성재기의 삶과 죽음은, 어떤 청년들에게는 ‘숭고한 영웅 서사’가 되었으며,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예컨대, 2014년 12월 황선·신은미의 통일 토크 콘서트 현장에서 인화물질을 터뜨린 오민준(19·가명)은 성재기를 매우 존경한 ‘성재기 키즈’였다. 그는 2013년 5월에는 “여성부 같은 곳에 가끔 택배로 폭발물을 보내기도 하고 정의의 테러리즘을 시행하는 폭탄마가 되고 싶다”라고 쓰기도 했다.
『시사IN』은 “온라인에서 여성 혐오 담론에 공감하는 이들은 자신이 ‘약자를 짓누르는 쾌감’을 추구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미 여성 상위 시대가 왔는데도, 군 복무와 같은 의무를 남자만 지는 현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분노다. 강자의 짓누르기가 아니라 약자의 저항으로 자신의 분노를 정의한다.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낄 때, 분노는 에너지를 얻고 공감대는 폭넓게 쌓인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숨까지 ‘희생’한 성재기라는 아이콘은 극단적이어서 더 선명한 사례다. ‘성재기 키즈’의 등장은 몇몇 젊고 모험주의적인 남성의 돌출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돌출 행동을 생산해내는 바탕 정서는 뿌리가 깊고 공감의 폭이 넓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제 삶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할수록 모험주의와 극단주의의 토양은 비옥해진다. 앞으로도 더 많은 ‘성재기 키즈’를 만날 각오를 해야 할지 모른다.”17
이런 불길한 예측을 뒷받침하듯, 한국 사회는 ‘잉여 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 2013년 9월 『잉여 사회』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최태섭은 잉여 사회를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고, 그중 몇몇이 이기지만 결국 착취당할 기회를 갖게 되는 종류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18
그런 비극적인 잉여 사회는 남녀 모두에게 닥친 재앙이었고 여성에게 더 큰 타격을 주었건만, 가부장적 사회체제하에서 그걸 더 절박하게 느낀 남성들은 여성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잉여화를 가중시킨 원인으로 이해하게 된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
앞으로 더 많은 ‘성재기 키즈’를 만날 수 있다는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2015년 1월 ‘성재기 키즈’의 등장을 알리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하기 위해 터키에서 사라진 김모 군(18)의 트위터 메시지 사건이다. 그는 2014년 10월 터키로 떠나기 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지금은 남자가 차별받는 시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고 남겼다. 이게 알려지면서 네이버·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 ‘페미니스트’는 며칠 동안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머무를 정도로 큰 화제가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19
양선희의 취재에 따르면, 김모 군의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말은 생각보다 또래 남성들 사이에 ‘격한 공감’을 일으켰다. 이렇게 맞장구를 치는 남자가 많았다고 한다. “남녀평등이 아니라 남성 노예화다. 여자들은 힘든 일, 돈 드는 일은 남자에게 하라고 한다.” “권리 주장에 강한 한국 여자들이 자기에게 유리한 건 옛날식 매너를 강요한다.” “요즘 엄마들은 아들의 남성성도 발현하지 못하도록 억압한다.” “남성성을 이해 못하는 여성들의 남성 혐오는 페미니즘이라면서 여성 혐오는 왜 범죄라는 건가.”20
이렇듯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월 21일 국립국어원에 『표준국어대사전』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정의를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의견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 의견서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과 한계를 인식하며 이에 대한 의견을 제출합니다. 최근 온라인을 비롯한 한국 사회 전반에서 여성 혐오 현상이 더욱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터키에서 실종된 한국인 김모 군의 ‘페미니스트를 싫어한다’는 트위터 메시지가 알려지면서 ‘페미니스트’ 뜻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가운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페미니스트’를 ‘「1」 여권 신장 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 「2」 여성을 숭배하는 사람. 또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로 잘못 정의하여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인과 몰이해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페미니즘’ 및 ‘페미니스트’ 정의를 아래 내용을 참고하여 개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현재 여성 운동 진영에서는 ‘페미니즘’을 ‘계급, 인종, 종족, 능력, 성적 지향, 지리적 위치, 국적 혹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더불어,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들’이라는 의미로, 또한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정의 개정을 비롯한 국어에서의 성차별을 불식시키기 위해 적극 노력해주시기를 촉구합니다.”

‘페미니즘의 종언’인가?
이 의견서의 핵심은 페미니즘의 뜻을 기존 ‘여권 신장 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으로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선희는 「페미니즘의 종언」이라는 칼럼에서 “한데 페미니즘은 지금 사전의 뜻이 맞다. 개념의 발전에 따라 뜻을 보탤 수는 있지만 이를 바꿔 그 역사성과 행적을 숨겨선 안 된다”고 했다.
양선희는 “한때 열렬히 페미니즘(feminism·여성주의)을 주창했던 선배는 요즘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고 선을 긋는다. 유능한 ‘알파걸’들을 탐구한 책에서도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알파걸은 없다고 했다. 각 분야의 성공한 여성들 중 여성 운동가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항상 옳다’는 일부 극렬 페미니스트의 도덕적 선민주의, 여성 운동을 발판으로 정계에 진출해 기득권층화한 일부 여성 정치인, 남성에 대한 혐오감으로 변질된 일부 극단적 페미니즘이 주는 불편함이 커서다.……과거의 여권(女權)은 인권의 한 종류라 하기엔 민망할 만큼 열악했다. 페미니즘은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 이젠 페미니즘과 안티페미니즘을 넘어 전혀 새로운 변증법적 합(合)에 도달할 차례다. 여성주의를 살짝 비튼 양성 평등으론 답을 찾기 힘들 거다. 인권을 넘어선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 공존을 위한 방법론의 탐색 등 차원이 다른 인간 탐구가 이뤄져야 할 때인 것 같다.”21
이 칼럼은 여성으로선 큰 용기를 내서 쓴 것임에도 댓글엔 칭찬은 별로 없었고 댓글러들은 대부분 김모 군의 주장을 확대재생산하기에만 바빴다.
“양성 평등 외친다는 여성부야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여자들도 군대 가는 법을 만들기 바란다. 아들 가진 부모들은 억울하다.”
“소개팅 할 때 남자가 식사 값을 나눠 내자고 하면 쪼잔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아직 많고 결혼할 때 남자가 집을 해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아직 많다. 외벌이로 남자가 돈을 벌어도 집에 오면 가사 분담 당연히 시키는 여자도 많다.”
“여자에 대한 각종 혜택과 배려가 듬뿍 담긴 정책을 평등권 확보된 것이라고 오도해선 안 된다. 그것은 남자에 대한 명백한 역차별이다. 요즘은 여자가 성을 무기로 슈퍼 갑질을 하면서 남자를 억압하고 패가망신시키고 있다. 세상에, 민주국가, 법치국가에서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어차피 경제 위기 오거나 전쟁 발발 혹은 통일이 되면 남한 여자의 노동력은 쓸모없게 될 텐데, 그때 남자들이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여자에게 보복할 거다.”
“정말 여성들은 알아야 한다. 『여성신문』도 보도했다. 심층 면접을 해보니까 요즘 10대 남학생들은 여성 혐오 감정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어린 남학생들이 봐도 페미들과 일반 여성들의 행태가 도를 넘어섰다는 게 딱 보이는 거지. 학교만 해도 여교사가 권리만 챙기면서, 힘든 의무는 남자 교사에게 떠넘기는 거, 남학생들 눈에도 보이는 거지. 큰일이다. 10대 시절에 경험한 분노와 혐오 감정은 평생을 갈 텐데, 여자들은 이제 남자의 분노 어찌 감당할까?”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
이런 분노의 표출에 유명 칼럼니스트까지 가세하고 나서는 일까지 벌어졌다. DJ 겸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2월 2일 발행된 패션지 『그라치아』 2월호에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칼럼을 기고해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IS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김모 군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다.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군 가산제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공평함의 문제는 사라지고 누가 더 유리한가의 문제만 남는다. 당연히 남자들은 반발한다. 교육의 힘으로 참고 이해하려 했던 남녀평등의 문제를 넘어 자신들의 생존이 걸리는 순간 강력히 저항한다. 살아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 때문이다. 남성연대와 ‘일베’가 바로 그 증거다.”22
『그라치아』와 김태훈은 사과를 했지만, 여성들은 2월 10일부터 트위터 등 SNS상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에 대해 손아람은 “이런 운동이 될 정도면 페미니즘은 아주 위기에 처했다는 위기의식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규정은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잘 쓰지 않는다. 개념적인 범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보단 직접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하는 대신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거다.”23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에 반격이라도 하듯, 네이버는 2월 15일부터 웹툰 〈뷰티풀 군바리〉를 정식 연재했다. 이 웹툰은 여자도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된 가상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남자만 당하는 부당함’을 여성이 이해하게 되는 장면에서 남성 독자의 공감을 얻었다. 〈뷰티풀 군바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 그걸 잘 말해주었다.
“남자로서 진짜로 여자가 군대 가길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 지키는 군인들 노고를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3화) “군내 부조리까지 상세하게 묘사해주신다면 여자들이 군인의 노고를 업신여기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3화) “모든 여자들의 사고방식이 여성부와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3화) “군 가산점 폐지 원인은 여성부였습니다.”(2화)24
구자준은 『전략적 여성 혐오 서사의 등장과 그 의미: 웹툰 〈뷰티풀 군바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뷰티풀 군바리〉는 남성 청년의 몫을 빼앗는 자로 여성을 지목하며, 올바른 여성상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교정 전략 및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며 “많은 이들에게 ‘역차별’에 대한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노골적인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드러내는 네티즌까지 독자로 포섭한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성차별적 인식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에 기반한 서사가 한 편 더 출현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여성은 청년세대 내부에서 다시금 타자화되며, 여성 혐오적 정서는 군대의 부조리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라는 안전한 외피를 두르고 확산되고 있다”고 평가했다.25
당시 사회적 상황은 어떠했던가? 이른바 ‘삼포(연애·결혼·출산 포기)세대’에 ‘사포(삼포+취업 준비로 인한 인간관계 포기)세대’, ‘오포(사포+내 집 마련 포기)세대’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로 청년들의 삶은 계속 어려워지고 있었다.26 2월 취업 포털사이트 ‘사람인’이 2030세대 2,880명을 대상으로 “연애, 결혼, 출산, 대인관계, 내 집 마련 중 포기한 것이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1,660명(57.6퍼센트)이 ‘있다’는 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27
청년들의 그런 고통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건만, 묘하게도 청년은 남성으로만 대변되었고 이런 왜곡된 상황에서 분노의 폭발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엉뚱하게 여성을 향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
2015년 4월엔 장동민 사건이 터졌다. 개그맨 장동민은 4월 3일 방송된 JTBC 〈마녀사냥〉에서 같이 출연한 한혜진에 대해 “내가 싫어하는 걸 모두 갖췄다. 나도 혜진 씨가 싫어하는 걸 모두 갖췄다”고 했고, MC들이 “한혜진의 어떤 점이 싫냐”고 묻자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아무튼 모든 걸 갖췄다”고 말했다.28 관련 기사들은 이 발언이 “좌중을 폭소케 했다”고 전하고 있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일주일 후 장동민의 원색적인 여성 비하 욕설 사건 파문이 정점에 이르면서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는 장동민의 발언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장동민은 2014년부터 동료 개그맨 유세윤, 유상무와 함께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라는 팟캐스트 방송의 진행을 맡고 있었다. 논란이 점화된 것은 2015년 3월 15일 업로드된 49회 방송이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장동민은 코디네이터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던 도중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라거나 “창자를 꺼내서 구운 다음에 그 엄마에게 택배로 보내버리고 싶다”라며 욕설을 섞어 말했다. 장동민은 32회째 방송에선 ‘시X’, ‘개 같은 X’, ‘이 X’, ‘개보X’ 등은 물론 “여자들은 멍청해서 머리가 남자한테 안 된다”, “창녀야”,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 등의 욕설을 일삼았다.29
비난이 빗발치자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5월 2일 진중권은 트위터에서 ‘장동민에 대한 단상’이라는 여러 편의 짧은 글을 통해 장동민의 여성 혐오 발언을 비판하면서도 장동민에게 편중된 대중의 비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망언을 한 정치인들, 목사님들, 멀쩡히 현직에 남겨두는 사회에서 유독 연예인에게만 가혹하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망. 거기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존재한다”며 “위험하지 않은 대상을 향해서만 분노를 표출하다 보니 공직자 검증의 패러다임이 졸지에 연예인에게로 옮아가는 경향이 발생하는 듯”이라 분석했다.30
이에 대해 위근우는 「그 진중권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반론에서 “그의 문장은 결과적으로 남성의 폭력을 두둔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근 다시 장동민에 대해 ‘광대의 철학’이라 감쌌지만, 진중권이 과거 ‘광대의 철학’이란 글에서 내세운 모델은 스타 학자였던 플라톤을 조롱하고, 최고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을 멋쩍게 했던 디오게네스다. 만만한 여성을 대상으로 혐오 발언을 하고, 자신을 감싸주는 방송 환경 안에서 안전하게 반성하는 장동민의 무엇을 광대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까.”31
한국 사회가 연예인에게 가혹한 건 분명했다. 연예인 스캔들 또는 스캔들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사소한 문제를 부풀려 장사하는 일부 미디어의 행태와 그걸 소재로 맹목적인 ‘마녀사냥’에 나서는 익명 네티즌들의 행태는 너무도 가혹해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건은 그런 종류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여성 혐오에서 중요한 건 문화적 영향력이었기에 연예인은 정치인보다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장동민은 제대로 책임을 지지도 않았고 여전히 건재했기에 논란은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남지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의 혐오적 개그에 대한 지적이 방송 직후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장동민이 MBC 〈무한도전〉의 고정 멤버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일어난 후에야 논란이 됐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사과는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한 책임만은 교묘하게 피해갔다는 점, 그들의 끔찍한 언행은 금세 잊히고 텔레비전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32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
사실 장동민이 페미니스트들을 가장 화나게 만든 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는 그의 발언이 개그가 아니라 원색적인 욕설도 불사해가면서 실천하는 그의 신념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신념이야말로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여성을 옥죄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기에 페미니스트들은 장동민의 발언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고’는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라고도 번역되었다. 온라인 도서 판매 업체 알라딘은 발 빠르게 이 문구로 키링을 제작해 사은품으로 증정했다. ‘와일드블랭크 프로젝트’라는 단체는 이 문구를 새긴 가방을 제작해 텀블벅에서 2,000만 원이 넘는 후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이 슬로건은 책으로까지 등장했다. 정희진 등 여성학자들은 나중에(2017년 1월)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라는 페미니즘 입문서를 출판한다. 이은솔이 잘 평가했듯이, “여성 혐오의 아이콘이던 장동민의 말이 페미니즘의 슬로건으로 재탄생한, 그야말로 ‘전복’이다”.33
이 사건과 관련, 손희정은 ‘파퓰러 페미니즘’을 다룬 논문에서 “우리는 대중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과 연예 권력의 강력한 남성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메갈리아와 사회적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것과 같이 그들 역시 ‘상품’이자 ‘동료’인 남성 연예인을 지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워나가려 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동민은 아마도 대한민국 페미니즘 역사에서 종종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이 싸움의 승패가 어떻게 기록되느냐와 무관하게 그의 이름은 오명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때때로 그 전략과 전술에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우리는 옳은 싸움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주 오랜 시간 후에라도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기록될 터이기 때문이다.”34
훗날 달라질망정 남성들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반감과 혐오는 점점 더 넓어지는 동시에 깊어지고 있었다. 경제적 낙오자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시대에서 심화되는 ‘남성의 위기’가 페미니즘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었으니,35 이는 사실상 노동의 문제요, 경제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나영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남녀’라는 탈을 쓴 계급 갈등”이라며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많은 이가 분노를 대리 배설할 수 있는 타깃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36
이게 바로 2015년 봄까지의 상황이었는데, 이후 2030세대의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면서 페미니즘 혐오도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2015년 여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가 한국을 덮치면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 사건은 한국 여성 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메갈리아 탄생으로 이어진다.

“남자는 숨 쉴 때마다 한 번씩 때려야 한다”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2015년 5월 29일 인기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는 메르스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메르스 갤러리(메갤)’를 만들었다. 이곳에 메르스 의심 증상을 보이던 두 여대생이 격리 조치를 거부해 메르스를 퍼뜨렸다는 루머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 해당 여대생들에 대해 디시인사이드의 누리꾼들은 “이러니 김치녀 소리를 듣는다”, “원정(원정 성매매) 가는 거 아니냐”, “명품백 멘 것이 딱 한국 된장녀”, “쇼핑에 환장했다”라며 성적 모욕감을 주는 발언은 물론 한국 여성 전체를 싸잡아 비아냥거렸다.37
해당 내용은 사실무근으로 드러났고, 이 소동은 그대로 묻히는 듯했지만, 곧 메갤에는 사실도 아닌 내용으로 ‘김치녀’라며 한국 여성을 싸잡아 비난한 한국 남성들의 여성 혐오적 행태를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젠더 위계를 반전시킨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빗대 자신들을 ‘메갈리아의 딸들’로 부르다가 여성 혐오에 대한 저항이 생물학적 여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에 ‘메갈리안’으로 바꾸었다.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여성 혐오의 중심에는 혐오 전문 사이트 ‘일베’가 있었는데, 메갈리아는 일베를 중심으로 각종 여성 혐오 용어가 퍼져나가는 양상을 ‘미러링(mirroring)’으로 대응했다. 미러링은 ‘거울(mirror)처럼 반사해서 보여준다’는 뜻이다. 거울이 좌우를 바꾸어 보여주듯, ‘미러링’은 성별의 배치를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여혐혐(女嫌嫌)’, 즉 ‘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를 실천하는 기법이었다.
여성 혐오자들은 “여자는 삼 일에 한 번 때려야 한다”를 줄인 ‘삼일한’이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이에 대항해 메갈리아는 “남자는 숨 쉴 때마다 한 번씩 때려야 한다”는 ‘숨쉴한’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허영심 많은 여성을 일컫는 ‘김치녀’에 대항해서는 ‘김치남’, ‘한남충(벌레 같은 한국 남자)’ 등의 용어를 만들었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는 군 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쳤다. ‘보슬아치(보지+벼슬아치)’에 대해선 ‘자슬아치’, ‘꽃뱀’은 ‘좆뱀’ 등으로 바꿔 부르며 맞불을 놓았다. ‘가슴 크기’로 여성을 평가하는 남성은 ‘6.9㎝짜리 작은 성기’를 가진 존재로 불렸다. 세간에 떠도는 습관적인 여성 비하 발언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뒤집어졌다.
“남자는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이나 해야 된다.” “남자는 집에 가서 애나 봐라.” “남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 잘생긴 게 최고지.” “역시 술은 남자가 따라줘야 제맛이다.” “잘생긴 남자 따먹고 싶다.” “남고생 따먹고 싶다.” “군대 가기 싫었으면 싫어요 했어야지. 즐긴 거 아냐?”38
메갈리아는 여성 혐오에 앞장선 인물들을 겨냥한 언어들도 탄생시켰다. “여자들은 더치페이하라”를 외치다 2013년 한강에 투신한 성재기의 투신은 ‘(무의미하게) 죽다’, ‘끝장나다’ 등의 뜻을 가진 ‘재기하다’란 조롱조 표현으로 쓰였다. 이 밖에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IS로 간 김모 군, ‘개보년’ 등 여성 혐오적인 막말을 한 옹달샘(장동민·유세윤·유상무) 등은 ‘페미 요정’으로 불렸다. 이들의 언행에서 만연한 여성 혐오를 실감하고 메갈리아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에서였다.39

“혐오 발언을 뒤집어서 되돌려주니까 꼼짝 못하더라”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처음에 거친 언어를 구사하는 메갈리안이 등장하자 남성 커뮤니티에선 “여자가 어떻게 저런 험한 말을 쓸 수 있나”라며 당황했고, 그동안 김치녀와 된장녀라는 말에 대해서는 자정능력에 맡겨야 한다던 디시인사이드 운영자가 ‘김치남’과 ‘김치녀’ 둘 다 사용 금지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노혜경은 “그러니까 일베적 언어가 난리를 쳐도 모른 척하던 관리자가, 여성 혐오적 언어를 모르는 척하던 관리자가 그것을 ‘미러링’하는 방식의 언어가 나오자 ‘혐오 표현을 규제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도 디시인사이드 관리자는 근대의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공정성은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왜냐면 김치남은 김치녀를 뒤집은 것인데, 김치녀는 되고 김치남는 안 된다고 하면 자기가 여성 혐오자라는 걸 커밍아웃하는 것이 되니까 그것이 부끄러운 줄 알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끄러울 수 있었다는 것이 ‘대박’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워하면서 김치남과 함께 김치녀가 금지되는 걸 본 여성들이 ‘아! 이거 좋은 전략이로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뒤집어서 되돌려주니까 쟤네들이 꼼짝 못하더라’ 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미러링을 사용했다고 한다.”40
디시인사이드의 ‘공정한’ 조치에 대응해 메갈리안들은 6월 6일 메갈리아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다. 신상 노출의 위협을 염려한 운영자는 이를 자신의 신상과 다른 가계정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메갈리아1’에 쏟아진 댓글 공격과 신고 때문에 실명 인증이 필요해졌고, 가계정이라 인증을 하지 못해 ‘메갈리아1’ 페이지는 닫히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실명 계정으로 운영한 ‘메갈리아2, 3’은 페미니즘 관련 카드 뉴스를 만들거나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기사 논평을 하는 수준이었음에도 신고 누적으로 삭제되었고, ‘메갈리아4’에 이르게 되었다.41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메갈리아는 8월 6일 자체 사이트도 출범시키면서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그런데 ‘여성 혐오’라는 말은 나중에 적잖은 오해와 혼란을 초래했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 무시, 배제를 ‘여성 혐오’라고 칭한 것에 대해 일부 남성들이 “내가 여성을 왜 혐오하느냐. 나는 여성을 좋아한다”라고 대꾸하는 등 ‘여성 혐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성 혐오’는 영어 미소지니(misogyny)를 번역한 것인데, misogyny는 부정접두사 ‘mis~’에 여성을 가리키는 ‘gyn’가 결합된 단어다. ‘여성 혐오’라는 말이 대중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2012년 5월에 번역·출간된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책 『여성을 싫어하는 일본의 미소지니(女ぎらいニッポンのミソジニ-)』가 국내에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면서부터였다. 이에 대해 장슬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에 대한 만성적인 임금 차별, 공공장소나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 ‘묻지마 살인’으로 불리는 페미사이드(femicide)까지 모두 ‘혐오’라는 단어로 불리게 됐다. 혐오는 보통 극단적인 감정이 담겨 공격적인 언어나 행동으로 표출되는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맥락에서 여성을 ‘혐오’한 적 없는 남성들은 ‘내가 언제 여성을 혐오했느냐’는 반문을 하게 된다.……또한 혐오는 보통 강자가 약자에게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다. 약자가 강자에게 갖는 감정은 혐오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따라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호모포비아), 외국인 혐오(제노포비아) 등의 말은 논리적으로 가능할 수 있지만 책 제목처럼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고 해버리면 ‘혐오’를 마치 ‘동등한 주체 간의 대립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처럼 느끼게 만든다. 의도와 무관하게 ‘여성 혐오를 혐오’하면서 ‘남성 혐오’라는 말은 예정됐다. 여성 혐오를 남성이 할 수는 있지만 이에 대항해 여성들이 남성을 혐오하긴 어렵다.”42
‘여성 혐오’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오해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남성이 ‘여성 혐오’를 오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성 혐오’라며 반격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런 반격엔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반격도 한번 터진 봇물을 저지할 순 없었다. 김서영은 메갈리아의 등장은 겉으론 우연인 듯 보이나 사실 언제고 터질 필연이었다고 말한다. 그간 여성들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개똥녀’, ‘된장녀’를 시작으로 ‘루저녀’, ‘개념녀’, ‘트렁크녀’ 등 각종 ‘~녀’ 시리즈가 줄을 이었다. 모두 여성을 대상화하고 낙인찍는 표현이다. 남자 기를 살려주고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개념녀’는 찬양의 대상이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된장녀’라 비난받았다. 여성의 피부, 가슴 크기, 얼굴 심지어 성기 색깔까지 평가 대상이 됐다. 2014년쯤 등장한 ‘김치녀’ 담론에서 한국의 여성 혐오는 정점을 찍었다. ‘된장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검소하게 데이트 비용을 나눠내는 ‘개념녀’가 되면 됐지만, ‘김치녀’는 한국 여성이라면 연령·계층을 불문하고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43

왜 여성들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걸 모르는가?
비극은 여성들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걸 모르는 남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큰 문제임에도 “그게 왜 문제가 돼?”라고 생각하는 무감각과 무신경, 이게 바로 여성 혐오의 한 근원이기도 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집행하는 주무부서인 고용노동부가 “(면접관이 성희롱성 질문을 하면) 농담으로 잘 받아칠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면접 모범 답안을 내놓은 것이나(2014년 11월), 8월 12일 울산 물총축제 공식 홍보물의 메인 카피가 “누나 나랑 한번 박자 살살할 게”였던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44
8월 21일 ‘나쁜 남자들의 바이블’을 표방한 남성 잡지 『맥심(MAXIM)』이 공개한 9월호 뒷면 표지 사건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뒷면 표지는 악역 전문 남성 배우 김병옥이 여성을 납치하는 상황을 연출했는데, 담배를 피우는 김병옥 뒤에 세워진 차량 트렁크 밖으로는 여성의 다리가 청색 테이프로 묵인 채 나와 있었다. 표지에는 ‘THE REAL BAD GUY(진짜 나쁜 남자)’, ‘50여 명의 악당을 연기하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진짜 나쁜 남자는 바로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청와대 신문고, 여성가족부에 민원을 넣겠다”, “이게 출판이 된단 말이야?”, “열 받는 걸 넘어서 절망하게 된다” 등의 댓글을 게재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맥심코리아 측은 이날 홈페이지를 통해 ‘화보 전체의 맥락을 보면 아시겠지만 살인, 사체 유기의 흉악 범죄를 느와르 영화적으로 연출한 것은 맞으나 성범죄적 요소는 화보 어디에도 없습니다’고 해명했다. 이어 “일부에서 우려하시듯 성범죄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한 바 없다”라며 “영화 등에서 작품의 스토리 진행과 분위기 전달을 위해 연출한 장면들처럼, 이번 화보의 맥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려넣은 범죄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라고 말했다.45
이에 메갈리아 유저들은 『맥심』 편집부와 여성가족부, 간행물윤리위원회를 대상으로 “여성의 현실적인 공포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하지 마십시오”라는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 같은 사실이 외신으로 알려지면서 미국 맥심 본사가 규탄 메시지를 내는 등 문제가 확산되자 맥심코리아는 뒤늦게 9월 4일에서야 사과문을 냈다. 맥심코리아는 사과와 함께 9월호 전량을 회수하고 수익금 모두를 성폭력 예방 여성단체에 기부할 것을 약속했다.46
메갈리아의 승리였지만, 『맥심』 표지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프로불편러’라 칭하며 비아냥대는 글이 온라인에 꾸준히 올라왔다. 이에 김홍미리는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화장실 몰카(찍기+보기) 정도는 스스로 부끄러워 그만둘 것이라 여기며 대꾸하지 않았던 방심이 회원 수 100만 명이 넘는 몰카 천국 소라넷을 키워왔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래된 ‘농담’인 여성 혐오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오래된 농담을 거부하는 메갈리안은 이 사회에서 ‘문제적’이다. 여혐(여성 혐오)을 쏟아내는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는 ‘좋아요’ 회원이 16만 명(159,286)에 육박하고, 여혐을 반대하며 만들어졌으나 세 번의 폐쇄 조치를 당한 끝에 살아남은 ‘메갈리아4’ 페이지의 ‘좋아요’ 회원은 1만 명(9,969명)이 채 안 된다. 1만이 채 안 되는 이들에게로 혐오의 시대에 대한 우려가 집중되고 있다.”47

“남자 10명 중 1명은 짝이 없는 남성잉여세대”
메갈리아 논란이 한창이던 2015년 9월 17일 『시사IN』은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천관율 기자)이라는 기사를 게재해 큰 화제를 모았다. 이 기사는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회사 ‘아르스프락시아’와 함께 2011~2014년 3년 동안 일베에 올라온 게시글 43만 개를 원자료 삼아 ‘여성 혐오 담론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는 ‘군대’가 핵심일 것이라는 통념을 깨트렸다. 여성 혐오 담론 지도에서 군대 문제는 주변부에 고립되어 있고, 단어의 등장 빈도로도 732회에 불과해 20위권 밖이었다. 이 지도에서 두드러지는 키워드는 ‘김치녀’였다. ‘여성(‘여자’ 등 유사 단어 포함)’이 1만 159차례 등장하는 동안 ‘김치녀’는 8,697차례 등장했으니, ‘김치녀’는 한국의 여성 혐오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 것이다. ‘김치녀’의 탄생 배경은 데이트 경험이었다.
“짝짓기 시장, 그러니까 결혼까지 포함해서 ‘연애 시장에서의 환멸’이 여성 혐오의 뿌리다. 여성 혐오 담론에서 ‘김치녀’란 무엇보다도 ‘연애 시장에서 반칙을 하는 여자’를 뜻한다. 반칙이란 뭘까.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남자의 능력을 따지는 여자’,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데이트 비용은 남자에게 물리는 여자’,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결혼할 때 집은 남자가 마련해야 한다는 여자’, ‘자기 외모는 성형으로 과대 포장하면서 남자의 능력은 칼같이 따지는 여자’다. 포괄적으로 정의 내리면 이렇다. ‘연애 시장에서 (사람 됨됨이나 사랑이 아니라) 남자가 보유한 자원을 따져서 분수 이상으로 한몫 잡으려는 여자.’ 한국의 젊은 남성을 사로잡은 여성 혐오 담론이 내놓는 ‘김치녀’의 원형이다.”
천관율은 “이 여성 혐오자들이 보기에 사랑이야말로 연애 시장에서 유통되어 마땅한 유일한 화폐다. ‘김치녀’는 연애 시장의 화폐를 사랑에서 남자의 경제력으로 바꿔놓는 시장 교란자다. 이렇게 해서 극적인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 혐오는 이 시장 교란자를 단죄하는 정의로운 분노이자, 사랑에 충실한 순수한 남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숭고한 경지가 된다. 여기까지 오면 여성 혐오는 숨겨야 할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다. 차라리 자긍심의 원천이다. 여성 혐오는 연애 시장에서 최하층에 위치하는 ‘루저’의 정서를 뛰어넘어 ‘멀쩡한 젊은 남성’도 공유하는 집단 정서로 진화한다. 이제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에 실명을 걸고 ‘좋아요’를 누르는 남자들이 탄생한다.”
연애 시장에서 좌절을 느끼고 그 분노를 여성 일반에게 겨누는 남성 집단이 왜 이리도 대규모로 쌓여가고 있는가? 천관율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국은 산아제한 정책과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성비 불균형 국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점인 1975년에도 이미 출생 성비는 112.4로 붕괴 수준이었으며, 가장 심했던 1990년에는 성비가 116.5까지 치솟았고, 성비가 110을 넘긴 해도 13번이나 되었다. 남자 10명 중 1명은 짝이 없는 거대한 남성잉여세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보다 남자가 결혼에 적극적인 ‘문화적 성비 붕괴’ 현상도 일어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2012)에서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와 ‘하는 편이 좋다’를 합친 비율이 남자는 67.5퍼센트였던 반면 여자는 57퍼센트에 그쳤다. 한국의 연애 시장에서는 생물학적 성비 붕괴 위에 ‘문화적 성비 붕괴’ 10퍼센트포인트가 추가로 붙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남성잉여세대는 선배들이 겪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에 놓여 있다. 오늘날 연애 시장에서 좌절한 남성들은 웹과 모바일이 제공한 초연결사회에 살며 대단히 간편하게 서로를 발견하고, 여성 혐오를 배양하고 증폭해낼 공간을 온라인에서 확보했다는 것이다.

“여성 혐오는 결혼 시장에서 낙오된 남자들의 절망감”
연애 시장에서 여성이 더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면, 남성은 왜 ‘더 많은 호의’가 아니라 ‘더 많은 혐오’를 택하는가? 연애 시장의 논리로 보면 거의 자해 전략인 여성 혐오가 어떻게 해서 연애 시장에서 탄생할 수 있을까? 천관율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David M. Buss)의 이론에 근거해 “학대란, 자신보다 ‘시장가격’이 높은 여성 배우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가격 흥정 전략이다”고 말한다.
“마치 중고차를 고르며 이리저리 트집을 잡고 사고 기록을 따져 묻듯, 학대는 배우자 여성의 가치를 줄여 잡아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도구다. 이 전략은 분명 자기파괴적이고 위험하지만, 자신보다 ‘시장가격’이 높은 여성은 어차피 떠나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배우자보다 뒤처진 남성에게는 이판사판으로 해볼 만한 도박이 된다. 이 논리를 여성 혐오에 적용해보자.……‘뒤처진 남성’이 대규모로 축적되는데, 이때 여성 혐오는 마치 저강도 학대와 같은 효과를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가한다. 남성들의 머릿속에는 연애 시장에서 협상력이 딸릴 때에는 여성의 자긍심을 손상시키라는 전략이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절망적인 전략이다. 1대 1 관계에서는 학대를 통한 흥정에 성공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도 있는 반면, 온라인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저강도 학대는 애초에 협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서 가격 흥정이 될 수가 없다.”48
이런 원인 분석 후, 천관율은 「‘메갈리안’…여성 혐오에 단련된 ‘무서운 언니들’」이라는 기사에선 “미러링이란 여성 혐오의 문법에 익숙하고 충분히 갖고 놀 수 있으면서도 과속하지 않는 사람만이 가능한 외줄타기다. ‘탄생 정신’을 공유하지 않는 신규 유입이 이어지고 혐오 발화가 자체로 놀이 코드로서 매력을 갖게 된다면(일베가 정확히 이렇다), 그때도 섬세하게 지금 궤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중요한 질문도 있다. ‘혐오를 혐오로 돌려주는 방식’은 습관적으로 여성 혐오 언어를 써왔던 남성에게는 충격요법으로 먹혀들기도 했다. 하지만 맥락 없이 접해야 하는 온라인 공간의 다수 구경꾼에게 메갤발 혐오 발화는 그저 ‘여자 일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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