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명랑 독서

서민의 명랑 독서

페미니즘을 수단으로 한 위인전

  • 관리자 (inmul)
  • 2018-07-12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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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3번 운다.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어난 뒤 1번만 우는 것도 아니며,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 데다, 살아생전 나라가 망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3번’이라는 횟수에 대한 의문일 뿐,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명제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다. “남자가 되어서 울기는”이라는 핀잔은 내가 울 때마다 가해지는 핀잔이었다. 그러다 보니 눈물이 나올 때마다 눈치가 보였고, 어느덧 잘 울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다시금 눈물이 많은 사람이 된 것은 나이가 듦에 따라 많아진 여성호르몬 때문이기도 하지만, 페미니즘을 공부한 탓이 더 크다. 페미니즘 책들은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 같은 당위의 말을 금기시했고, 울지 않는 남자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나 역시 억지로 울음을 참기보다는 분출하는 게 슬픔을 달래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기에 울 일이 있으면 그냥 울기로 했지만, 남들이 볼까 싶어 민망하긴 하다. 이 민망함은 밥상머리 교육의 결과이리라.

페미니즘 책은 나를 부엌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해주었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쉽지 않았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내가 부엌 근처만 가도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고 겁을 주었다. 진짜 고추가 떨어진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부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만큼 편해지는 것이었으니, 그 말에 굳이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책을 읽고 ‘나는 결혼하면 반드시 집안일을 하리라’는 결심이 섰다. 그 결심을 실천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좋은 남편이라고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그래도 나처럼 집안일 하는 남자가 어디 있냐?”는 것인데, 내가 집안일을 여성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 역시 어릴 적부터 주입된 밥상머리 교육의 결과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왜 남성들은 변하지 않을까? 나는 밥상머리 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 등의 말이야말로 남자를 남자로 만든다. 그 말들의 일부는 남성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종합적으로 따져볼 때 남성에게 더 편한 길이라 남성이 억지로 변화할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남성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변화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절망한 여성들이 결혼을 피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남성의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딱 한 부류만 교육한다면 누구여야 할까? 바로 ‘아버지’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아버지의 생각이 자식에게 전달됨으로써 자식을 일반적 의미의 ‘남성’으로 만드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유진의 『아빠의 페미니즘』(책구경, 2018)을 읽었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면 ‘아버지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는 내용 같은데, 그게 아니라 저자의 아버지 J의 어록이었다. 책을 읽어보니 J는 우리나라 남성 중 페미니즘으로만 따졌을 때 상위 0.1퍼센트에 들어가고도 남을 사람이다. 책 몇 권 읽은 게 다인 내가 페미니스트를 참칭하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딸 유진을 낳은 뒤 J는 엄마에게 말한다. 아이를 더 낳고 싶은데 둘째가 아들일까봐 더는 낳지 못하겠다고. “아들이 생기면 진이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딸로 바라보게 된다.……우리 진이만 잘 키우자. 딸로서가 아닌, 한 명의 멋진 사람으로 살게 해주자.”(27쪽)

이 이야기를 들은 유진이 J에게 묻는다. 아들하고 주말마다 캐치볼 하고 싶지 않느냐고. J는 웃었다. 지금도 유진과 주말마다 캐치볼을 하는데 왜 그게 아쉽냐고 말이다. 심지어 이런 말도 한다. “나는 나의 아들을 가해자로 키우지 않을 자신이 없다.……여성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과 사회적 폭력에 침묵하지 않을 수 있는 남성으로 키워낼 자신이 없다.”(32~33쪽) 이 말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아들’만 원하는 시댁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게다가 이런 타박은 어머니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J가 나서서 선언했다. “아이 낳는 문제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려 든다면, 모든 연을 끊겠다.”(32쪽)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사회가 잘못되었다면서 J가 한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다. “나는 네가 성을 버렸으면 좋겠다. 나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47쪽) “J는 딸을 사위에게 넘겨주는 결혼식 따위 참석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딸을 빌미 삼아 축의금 장사를 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58쪽) 이 책에는 이런 식의 충격적인 어록이 계속 나온다. 그래도 페미니즘에 열려 있는 내가 ‘충격’이라 표현할 정도면, 일반적인 남성들은 더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이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음 대화를 보자.

J: 너 미혼모가 된다면 어떡할래?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래?

유진: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서 떨리는 목소리로) J에게, 나의 엄마에게, 오면 안 될까?

J: 당연히 집으로 오면 되는 거야. 나는 너의 결혼과 출산 계획에 관여할 계획이 없어. 다만 네가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거나,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된다면 당연히 내가 너를 보호할 거야. 너는 나의 딸이니까. 그 아이는 너의 아이니까.(96~97쪽)

정말 든든하지 않은가? 딸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미혼모가 되면 패륜아 취급하는 가정이 많은 판국에, 어떤 일을 해도 너는 내 딸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라니 가슴이 뭉클하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페미니즘을 수단으로 한 위인전’이라 쓴 이유다. 한편으로는 J 같은 아버지가 많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좋아질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가 페미니스트라면 자식들은 어려서부터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 관한 저자의 말을 옮겨본다. “딸을 키우는 아빠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아빠라는 직업의 책임과 의무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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