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구입

도서구입
붓다를 죽인 부처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음 | 신국판 변형 | 288쪽 | 14,000원 | 2011년 10월 22일 발행
ISBN 978-89-5906-200-3 03300

---------------------------------------------------------------
 
 


≫ 한국인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국제인의 시각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한국인’ 박노자. 한국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다양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날카로운 사회 비평으로 그동안 우리가 물들어 있던 현실이나 역사관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동양사상, 그중에도 ‘불교’가 있다. 인류의 탈자본주의적 해방의 등불로 마르크스가 있다면 인류의 궁극적 해방을 꿈꾸던 개혁가로는 붓다를 꼽는 그는,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말한 가르침에서 근대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사상의 영혼’,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진정한 개혁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아시아적으로 왜곡된 ‘불교’는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을 배반했는가

저자 박노자는 붓다의 가르침에 깊이 감화를 받은 불자다. 그를 매료시켰던 불교의 상생 논리와 비폭력 주의 등은 그가 평소 추구하는 이상과 철학적 맥락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불교를 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불교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가며 스스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조계종은 물론 현존하는 어떠한 종단에도 가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대부분의 불교 종단 내지 ‘공식적’ 단체들은 국가와 자본에 종속돼 있거나,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다 해도 국가와 자본과의 ‘편안한’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불교의 정신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붓다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라도 불교 종단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불교 종단은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일까?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는 석가족의 왕자로 알려진 ‘고타마 싯다르타’의 다른 명칭이다. 붓다라는 말이 중국에 와서 음역되는 과정에서 한자 ‘불(佛)’이 되었고, 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에 와서는 ‘부처’라 불리게 되었다. 단어가 뜻하는 바는 다르지 않지만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붓다의 가르침은 붓다의 초기 가르침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동아시아에 전래된 불교는 첫 시작부터 일정부분 왜곡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고 이후 전개된 모습도 수많은 모순을 낳게 되었다.

그 예로 저자는 ‘수능 기도’와 같은 현세 기복적 신앙 행위가 가지는 문제점을 든다. 나와 남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불교의 논리에 의하면 경쟁 사회에서 ‘남’을 누르고 ‘나’만 성공하기 위한 어떠한 기도나 기복 행위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입시제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정진대회라도 열어 모든 불자의 지혜와 신앙심을 모아 학력에 매달리지 않는 나라 만들기에 힘을 쏟아부어도 모자른 실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찰의 돈벌이로 ‘대입 기도’가 최고로 꼽히고, 몇몇 스님들의 고급 승용차 애용이나 고급 호텔 식당 출입 등이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이렇듯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되어버린 우리의 불교문화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가 지적하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시되어왔던 불교의 모순은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교계에 만연한 ‘여성 차별’, 부처님의 영험을 바라는 ‘뿌리 깊은’ 기복신앙, 대형 불사 추진 등 우리는 그동안 불교의 철학과 사상을 직접 배우기보다는 산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거나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꼽는 원효 대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저자는 대승 불교의 너무나 대승적으로 왜곡된 현세 구복적 불교의 논리가 어떻게 현실을 합리화하고 지배자의 폭력과 착취구조를 정당화하는 단서를 제공했는지 파고든다. 이는 어릴적부터 이론의 여지 없이 ‘위대한 고승’으로 주입되어온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쉽게 이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문제이기도 하며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주체 혹은 권력자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세뇌’시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국불교’다.


‘호국불교’에서 ‘해방 불교’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사격 훈련을 받아야 했던 여승의 일화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 불교계가 국가와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일제 강점기 천황을 위한 정복 전쟁이 불교적 실천이라는 논리 등 현재와 가까운 시점부터 호국불교의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한 원광 법사의 ‘세속 오계’ 등에 이르기까지 호국불교라는 ‘형용 모순’이 생기게 된 근원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간다. 호국불교라는 말은 ‘살인을 하는 부처’라는 말과 같이 모순적인 단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을 계율의 첫째로 삼는 종교인 불교에서 오늘날의 왜곡되고 모순된 ‘부처’는 인류의 행복과 편안함을 추구한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가르침을 ‘죽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국가라는 폭력 기구의 살인 교육과 불교계의 묵인 내지는 세속화로 말미암아 너무도 자연스러운 단어로 인식하게 되었다.

호국불교는 하나의 대표 사례에 불과할 뿐 불교계와 국가가 만들어온 ‘형용 모순’은 그 밖에도 많다. 가장 가까운 예로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나 2006년의 황우석 사태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 등은 모순 그 자체다. 불교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런 세속적인 문제를 대처하기 위한 논리가 결국 속류 ‘애국주의’를 동원하는 것이었으니 저자는 이 땅에 진정한 의미의 불교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고 한탄한다. 이는 또한 불교계의 민주적이지 못한 권위적인 서열구조와도 연관된다.

본래 의미의 불교가 이처럼 왜곡된 것은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한 결과다. 과연 그 타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저자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불교의 여명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처한 현실부터 오늘날 국가, 자본주의와 결탁한 현실까지 살펴보며 그 왜곡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과연 붓다가 원래 말하려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현실적인 권력자들과 가르침을 배반하는 무리들이 이 개혁적이고 인류 해방적인 개혁가의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 왜곡해 왔는지 살펴본다.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

이러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 기초한 지적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왔기에 우리가 놓쳐왔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불교계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하의 과도한 경쟁 시스템 등이 낳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교계에 만연한 모순은 결국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모순들이 투영된 집합체일 뿐 실제로는 그 욕망의 진원지인 ‘우리 자신’의 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우리 시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가르침으로 다시 탄생한다.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을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라고 밝혔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지만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이와는 달랐다.

우선 붓다는 여성 해방을 주장한 양성 평등론자이자 당시의 뿌리 깊은 신분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몸소 평등원칙을 실현한 종교 개혁가였다. “몸을 가지고 태어난 생물 사이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구별이 없다. 인간 사이에서 구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뿐이다”와 같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주장으로 붓다는 여성 차별을 위시한 인간 세계에 만연한 모든 차별 관행에 철퇴를 가한다. 또 인도 사성(四姓) 계급 중 최하층인 수드라(Sudra, 노예나 천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던 우바리 존자를 수행자의 일원으로 삼는 등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파격을 보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종래의 인도 종교가 극단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고 중도를 설함으로써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는 사상관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마르크스 가르침이 모든 인간들을 자본주의적 소외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인류의 궁극적인 해방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나 기부(보시) 문화 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초기 불교란 일체의 인간들을 해탈을 이룰 수 있고 해방의 가능성이 잠재된 존재라 보는 고차원적인 인간 해방의 철학이며 또 나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해탈을 추구하는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각 장의 끝 부분에서는 ‘사회과학자 박노자’와 ‘도법 스님’이 만나 나눈 대담이 이어진다. 현실 속의 문제에 대해 저자와 스님이 진지하게 생각을 나눈다. 과연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불교의 관점은 무엇인지, 또 오늘날 불교가 사회과학과의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는 문제나 ‘간화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영험 있는 ‘기도’의 문제나 병역거부, 자본주의적 삶의 문제, 명분 있는 분노와 폭력의 정당성과 같은 사회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결국 사회과학의 이론과 불교의 논리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불교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도 하지만 사회과학 역시 불교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불교의 ‘아힘사(비폭력)’은 오늘날 사회과학이 수용해야 할 대원칙 중 하나다. 수탈기구로부터의 민중 방어라는, 특정 상황에서 진보 운동가들이 피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차악일망정 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더라도 그 폭력의 나쁜 결과를 인식하고 이를 중지시켜 비폭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법 스님 역시 국가, 민족, 정의, 종교, 이념 등 어떠한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지라도 불교 철학으로 보면 어떤 명분을 붙여도 분노는 분노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사회과학이 불교로부터 수용해야 할 점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사실 종교라고 하면 자본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낳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인류가 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존재해야 함에도 불교를 비롯한 지금의 종교는 오히려 사회의 짐만 될 뿐 이런 역할을 외면하거나 아예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붓다 자신과 수행자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며 원만구족(모든 것을 완전하게 갖춘 깨달음의 상태)한 삶을 살았지만 오늘날 주류 종교계는 재정의 투명한 공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세속화되었으며 이윤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업’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또 붓다가 이루었다는 깨달음을 승려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 불교의 목표를 신비주의적이고 초세속적인 ‘깨달음’이 아닌 복지, 평화, 정의, 탈폭력 등의 의미를 담은 ‘심신의 행복’이나 ‘몸과 마음의 안락’ 정도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제안한다. 실제로 붓다는 무엇보다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가 말하는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이며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깝다. 책에 자세히 설명된 불교 용어는 불교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불교의 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붓다의 가르침 역시 ‘상식’에 속하는 문제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사회의 짐이 되어가는 종교가 아닌 평화를 지향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붓다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 책 속으로

보시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분배가 잘되는 사회일수록 안정적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보통 우리가 ‘보시’라 하면 흔히 사찰에 헌금, 즉 불전(佛錢)을 주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초기 불교 경전에서 보시(산스크리트어: dana)는 아주 넓게 ‘나누는 일’, ‘베푸는 일’을 의미한다. 수행자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는 것도 보시지만 하인이나 고용인, 손님, 친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재산 가진 사람의 도리다. (p. 35)

붓다의 가르침은 초자연적인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주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계시’의 성격도 갖지 않는다. 붓다는 누구나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설함으로써 그 진리의 자율적인 이해를 유도할 뿐 자신에게 어떤 초자연적,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붓다는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구제할 수 있게끔 신도에게 업과 연기의 실상을 파헤칠 만한 지혜를 얻도록 도와줄 뿐이다. (p. 187)

일본의 보수적인 주류 사회에서는 ‘갈등’ 자체는 무조건 부정적인 것인 반면 ‘총화·단결·단합’은 무조건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거의 ‘국민 도덕’처럼 받들었던 이런 의식들은 바로 현실적인 세계(事)와 이상의 세계(理) 사이에 막힘이 없다(無碍)고 주장했던 화엄(華嚴)류의 ‘동아시아적으로 왜곡된 불교 사상’에 의해서 너무나 쉽게 합리화된다. (p. 252~253)

붓다 자신과 일부의 직계 제자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부 수행자들은 불평등과 폭력이 없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속인(俗人)들이 불평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염원했다. 초기 불교를 보면 그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이 뚜렷하다. 바로 이 ‘해방적 색깔’은 불교가 민중들로부터 빠르게 인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에의 의지’를 갖고 있던 초기 지도자들이 사라진 뒤에는,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방편론’ 등이 불교가 발 빠르게 ‘국가 종교화’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p. 279)

‘민중 방어적 폭력’도 나쁜 원인을 피하기 위해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하고 훈련시키는 군대와 같은 억압적인 상설 폭력 기구들은 ‘나쁜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천할 아무런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 역시 죽은 불교다. (p. 281)





◈ 지은이 박노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영화 <춘향전>을 보고 품은 막연한 동경 때문에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국립 레닌그라드대학교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국립 모스크바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립 모스크바대학교와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 경희대학교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를 거쳐, 2001년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현재는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인 아내와 사랑스러운 자녀들과 함께 오슬로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불교 사상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이다.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말한 가르침에서 근대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사상의 영혼’을 발견하고 깊은 감동 받은 바 있는 그는, 사회과학과 불교의 진리가 결국 통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그가 한국 불교에 던지는 통렬한 문제의식은 초기 불교의 경전에 대한 ‘해방적 시각’을 바탕으로 시간과 세대를 초월한 가르침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거꾸로 보는 고대사》, 《씩씩한 남자 만들기》,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박노자의 만감일기》,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하얀 가면의 제국》, 《나를 배반한 역사》,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이 있다.






◈ 목차

Ⅰ부. 붓다와 나의 시간


1. 욕망의 힘과 지혜의 힘
대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자

2. 여자의 몸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대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자

3. ‘기도발’은 약인가, 독인가
대담: 기도는 과연 필요한가

4. 계율을 지키는 일, 혹은 ‘나’를 지키는 일
대담: 병역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2부. 붓다와 국가의 시간

5. 불상은 과연 신상(神像)이어야 하는가
대담: 선불교의 우상파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6. 모자라면서도 탁월한 초기 불교의 민주주의
대담: 욕구를 정당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삶은 반불교적

7.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
대담: 호국불교를 말한다

8.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정말 문제없는가
대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9. 한국 불교, 전통이 아니라 시대를 만나라

공통정보입니다.

 

상품 리뷰
No 제목 작성자 날짜 평점
상품 문의
No 제목 작성자 날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