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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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종교
종교는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지은이 백중현 | 쪽수 312쪽 | 판형 152×225(신국판, 무선) | 값 15,000원 | 분야 인문사회
ISBN 978-89-5906-268-3 03300 | 출간일 2014년 11월 5일


키워드 : 대통령, 종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개신교, 불교, 천주교, 종교권력, 정치권력, 선교사, 기독교방송, 국가조찬기도회, 새벽기도운동, 목요기도회, 10․27법난, 국풍81, 정의구현사제단, 한기총, KNCC, 여의도순복음교회, 사랑의교회, 기독교회관, 명동성당, 조계사, 기독교 궐기론, 종교 편향,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강의석 사건, 기독교 정당, 뉴라이트전국연합, 종교인 과세


▣ 출판사 서평


종교는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권력을 통해 성장한 종교!
종교를 통해 성장한 권력!”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현재까지 대통령은 9명이다(재임 기간이 짧은 윤보선과 최규하는 제외). 이들을 종교별로 보면 개신교가 3명(이승만, 김영삼, 이명박)으로 가장 많고, 불교 1명(노태우), 천주교 1명(김대중)이다. 이들은 비교적 뚜렷한 종교적 색체를 드러냈다. 반면 전두환과 노무현은 취임 전 천주교인이었으나 퇴임 이후 불교와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등 ‘성향’ 수준에 머물렀다. 최초의 부녀 대통령인 박정희와 박근혜는 공식적으로 종교가 없다. 대통령들이 엮어간 종교 관련 사건들은 정치적 사건을 방불케 할 만큼 다양하고 그 자체로 흥미롭다. 개신교 대통령일 때는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종교 편향 논란이 일었으며, 군사독재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해 종교계와 유착하기도 하고 종교를 탄압하기도 했다. 진보정권이 들어서자 보수 종교인들은 가장 큰 반정부 세력이 되기도 했다.
『대통령과 종교: 종교는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는 대통령과 종교를 다룬 최초의 책이다.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통령의 종교 성향과 재임 기간 있었던 종교적 사건, 종교 편향 논란 등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과 종교가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는지 살펴본다. 특히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종교는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세력이 되어버렸다. 김영삼 장로 대통령과 이명박 장로 대통령에서 보듯이, 개신교는 기독교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한기총과 대형 교회 목사들의 활약이 컸다. 개신교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때까지 정권과 밀착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몸집을 키워나간 정권의 수혜자였다. 그 후 진보정권인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개신교 대통령인 이명박을 압도적 표차로 당선시켰다. 이게 시사하듯, 개신교 130년의 역사는 그야말로 ‘성장의 압축판’이라고 볼수 있다. 그 과정은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개신교는 축복받은 종교다. 적어도 한국에서 이룩한 ‘압축성장’ 측면에서는 그렇다. 잘 맞아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한국 현대사의 변화의 시기마다 우연찮게 개신교에 기회가 생겼다. 일제가 물러난 해방 공간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한 출발선상에 있었지만, 해방군으로 들어온 미군에 의해 개신교의 독주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개신교는 역사적 고비마다 성장을 거듭해왔으며, 그때마다 개신교의 정치화와 권력화는 진행되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권력과 종교의 유착은 서양 종교인 개신교를 130년 만에 권력의 최정점에 세우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권력은 왜 종교에 호의적이었나?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 당시 이승만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역사적인 첫 회의를 시작했다.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겠다던 이승만은 그후 친개신교적 정책을 펼쳐나갔다. 첫 국회의원 선거가 ‘일요일’(1948년 5월 9일)이라는 이유로 다음날인 5월 10일로 연기한 것을 시작으로 건국 이후 첫 민간방송으로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의 허가를 내주었다. 크리스마스를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성탄선물과 크리스마스카드를 많이 만들자’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군대에서 개신교 선교를 가능케 한 ‘군종제도’의 시행은 이승만의 개신교 특혜 정책의 하이라이트였다. 이 군종제도는 1969년 불교계가 참여하기까지 개신교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었다.
박정희는 개신교의 도움이 절실했다.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지해야 했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도 필요했다. 개신교는 미국인 선교사와 오랜 네트워크로 미국과 상당한 인맥을 갖추고 있었고, 뿌리 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었다. 반공은 개신교와 군사독재정권이 밀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끈이다. 반공은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군사독재정권에 힘과 명분을 실어주었고, 개신교 역시 반공을 외치며 군사독재정권과 가까워졌다. 반공은 당시 모든 상황에서 쓰이는 ‘만능 요술봉’ 같은 이데올로기였다. 개신교는 5·16쿠데타 직후 환영 성명을 발표하는데, 지지의 근거로 삼은 게 바로 반공이었다. 1961년 5월 29일 KNCC는 “금번 5·16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가는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였다”고 했다.
불교계 최대 수난으로 기록되고 있는 10․27법난은 신군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불교계에 대한 전두환의 탄압이었다. 불교계는 신군부가 요청한 ‘전두환 지지 성명’을 거부했는가 하면,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광주로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불교계 정화 수사계획’이라는 이름하에 ‘10․27법난’을 일으켰다. 군경 병력 3만 2,000여 명이 전국 5,731개 사찰을 수색하며 불교계 인사 153명을 연행했다. 스님들은 ‘불교판 삼청교육대’를 경험했고, 강제적으로 참선하고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개신교는 ‘이명박 장로 대통령론’을 거론하며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들은 이명박 당선을 기원하는 ‘대선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개최하고, 이명박의 각종 비리 의혹이 터질 때마다 노골적으로 변론하고 나섰다.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지 않는 사람은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는 극언까지 했다. 개신교가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아니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개신교계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이명박은 대통령 선거 역사상 최대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종교는 권력의 나팔수인가?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 개신교 지도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의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위해서였다. 이 조찬기도회는 당일 KBS, MBC의 생중계를 포함해 세 차례나 방송되었고, 일간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당시 성결교 증경총회장이었던 정진경 목사는 “어려운 시기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 구석구석까지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9월 30일에는 ‘전두환 대통령 당선 축하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개신교 대표자들을 포함해 입법부, 사법부, 정치인 등 1,344명이 참석해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했다.
개신교는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발령 등으로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자 구국기도회 등을 열어 사회 분위기를 반공 쪽으로 몰고 갔다. 1975년 한 해에만 반공 관련 대형 집회가 네 차례나 열렸다. 7월 열린 세계기독교반공대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림길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유신 체제를 찬양하는 등 반공을 체제 유지의 방편으로 적극 활용했다. 또한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을 지지하며 전국적인 기도회를 열고 파병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특히 임마누엘 중대, 다윗 중대, 여호수아 중대 등을 만들어 “하나님을 공경하고 선한 싸움을 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구국십자군을 창설해서 목사들이 직접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대선에서는 불교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명박 정권에서 종교 차별을 받았다고 판단한 불교계가 선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불교계의 박근혜에 대한 공개 지지 선언은 줄을 이었다. 30·40대 불교 신자로 구성된 ‘3040 정각회’가 공개 지지 선언을 한 이후 태고종 보국회, 전국신도회, 대한불교종단진흥회,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등이 지지 선언에 동참했다. 불교인권위원회도 ‘불교동서화합선언’ 형태로 박근혜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한기총 등 개신교계도 대선 기간 어려움에 처한 박근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초대형 종교 이슈로 발전할 수 있었던 ‘신천지 관련설’과 ‘1억짜리 굿 사건’ 등을 잠재우는 공을 세웠다. 한기총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박근혜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혀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앞장섰다.


종교, 권력에 저항하다


1970년대 들어 국가권력에 협조적이었던 종교계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는 종교인들의 저항운동이 생겨났던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과 군사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움직임에 맞서 종교인들의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꿈틀거렸다. 그 중심에는 개신교가 있었다. 개신교는 도시산업선교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69년 7월 3선개헌반대운동을 시작으로, 1973년 4월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 1973년 12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1976년 3월 3·1민주구국선언, 1979년 11월 YWCA 위장결혼 사건 등에 관여하며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1974년에 일어난 대표적인 시국 사건인 민청학련 사건은 203명이 구속되고, 183명이 실형을 받은 최대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개신교를 비롯한 반정부 종교인들과 용공 세력이 연대한 국가변란 기도 사건으로 발표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종교인이 구속되자, 구속자 가족들은 매주 목요일 기독교회관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며 기도회를 진행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 시절 탄압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KNCC의 정례 기도회인 ‘목요기도회’로 발전했다.
천주교의 저항 움직임도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일부 신부들에 의해 노동사목, 농민사목, 인권사목 등이 진행되며 천주교는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시기 천주교의 저항 정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1967년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 1976년 함평고구마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천주교가 노동자와 농민 인권운동,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나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는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더욱 정권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려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전 세계에 한국의 인권 탄압을 알리기도 했다. 특히 1982년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친미 일색이던 개신교 내에 ‘반미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종교계의 저항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꽃을 피웠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KNCC는 민간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섰다. 1985년에 ‘한국 교회 평화통일선언’을 발표하고 1988년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통일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평화통일운동 ‘지침서’로 활용될 만큼 상당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다. 88통일선언은 통일의 원칙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이라는 기존 7·4남북공동성명의 3대 기본 원칙에 민중 참여와 인도주의 원칙을 추가한 5개 원칙을 골자로 한다. KNCC는 나아가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를 국제사회에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1986년 9월 제1차 스위스 글리온회의, 1988년 8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 1989년 5월 북미주 한국기독학자회의, 1990년 도쿄에서 열린 ‘한반도 통일과 선교에 관한 회의’ 등 국제회의를 열어 전 세계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종교의 미래를 위해


그동안 종교는 민주화 투쟁과 소외된 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며 전국민적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고향을 떠나서 도시에 정착해야 하는 이들을 위로했다. 새로운 도시생활과 공동체를 찾아야 했던 이농민들에게 교회는 위안의 장소이자 새로운 교제의 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운동 등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종교는 보수 세력의 어설픈 정치 실험으로 한국 사회에서 ‘권력화된 이익집단’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특히 안티기독교카페,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의 등장은 그만큼 종교가 권력화되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가운데, 내부의 권력 구조에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그것은 바로 2000년대 초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성장 1세대’ 목사들의 은퇴와 이로 인한 세대 교체다. ‘성장 1세대’ 목사는 개신교 최대 성장기인 산업화 시기에 교회를 개척해 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목사를 말한다. 이들은 개신교의 권력화를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다. 특히 개신교의 이미지는 2000년대 초반 공중파 방송의 교회 비리 보도로 인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개신교의 이미지가 추락한 근본적인 이유는 개신교 특유의 공격적 선교 방식이다.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 방식은 비개신교인들로 하여금 개신교는 ‘안하무인 종교’, ‘무례한 종교’, ‘속 좁은 종교’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개신교의 이미지 추락은 2005년을 기점으로 개신교의 교세 하락으로 이어졌다. 1995년 876만 명이던 개신교 교세는 2005년 861만 명을 기록해 첫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국내 최대 교단인 예장합동은 2010년 교인이 281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1년과 2012년 2년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급기야 2010년대 들어 교회의 파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교인의 감소와 장기간의 경기 침체 때문에 교회의 은행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대출 현황에 따르면 교회가 은행 등 18개 금융회사에서 빌린 돈은 3,659건에 4조 5,107억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교회 대출 연체율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경매 시장에 교회 매물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도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2013년 7월에는 경기도 분당에 있는 충성교회가 종교 시설 가운데 역대 최고 감정가액인 523억 원에 매물로 나와 관심을 끌기도 했다. 교회 세습을 둘러싼 논란도 개신교의 이미지와 신뢰도를 추락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 차례


책머리에 ․ 005
프롤로그 | 개신교는 어떻게 성장했는가? ․ 008


제1장 해방 전후 | 개신교, 압축성장의 기틀을 다지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다 ․ 019 개신교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힘 ․ 021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종교 ․ 022 미국은 왜 개신교에 특혜를 주었나? ․ 024


제2장 이승만 |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겠다”
목사로 불리는 ‘장로 대통령’ ․ 033 “우리 대통령은 신앙자다” ․ 036 개신교 국가를 꿈꾸다 ․ 039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 043 이승만의 개신교 특혜 정책 ․ 045 크리스마스, 개천절, 석가탄신일 ․ 049 개신교, 정치에 참여하다 ․ 051 개신교, 교육에 참여하다 ․ 053 월남한 북한의 개신교인들 ․ 056 개신교와 이승만의 몰락 ․ 057 천주교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장면 ․ 059 이승만의 천주교 탄압 ․ 060 천주교 정권의 등장 ․ 063 육비구 할복 사건 ․ 064


제3장 박정희 | 반공과 친미로 절묘하게 만난 개신교와 군사정권
주일학교 선생, 박정희 ․ 069 “각하! 이대로 지옥 가시겠습니까?” ․ 071 ‘주일 국가행사’가 부활하다 ․ 074 불교의 약진과 개신교의 쇠퇴 ․ 077 반공을 외치다 ․ 078 임마누엘 중대와 구국십자군 ․ 082 혁명 정부의 민간사절 ․ 084 전군 신자화 운동과 대형 집회 ․ 086 새마을운동과 새벽기도운동 ․ 089 하늘이 내려준 ‘성장 기회’ ․ 091 조찬공화국과 새벽기도운동 ․094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개신교 ․ 096 박정희 정권의 탄압과 목요기도회의 탄생 ․ 098 천주교의 저항과 3대 사건 ․ 102 진보 종교인의 탄생 ․ 106


제4장 전두환 | 당근과 채찍을 겸비한 ‘국풍 대통령’
불교에 귀의한 ‘천주교’ 대통령 ․ 111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다 ․ 114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 ․ 115 작전명 ‘45계획’ ․ 117 대형 종교 집회의 홍수시대 ․ 120 ‘선교를 전투처럼’ ․ 122 전두환이 교황 방문을 지원한 이유 ․ 124 난장판이 된 국풍81 ․ 126 ‘5·18’과 종교계 저항운동 ․ 127 반공 지상주의를 깨다 ․ 129 양심법이냐, 실정법이냐? ․ 131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134


제5장 노태우 | 개신교의 근간인 ‘친미’와 ‘반공’이 흔들리다
부처님 귀를 닮은 ‘불자 대통령’ ․ 141 직지사와 대통령 ․ 144 빅3 종교의 대리전 ․ 145 10원짜리 동전 불상 논란 ․ 149 노태우의 불심 달래기 ․ 151 평화통일운동을 싹틔운 개신교 ․ 152 종교인들의 방북 ․ 154 보수 개신교의 대변자, 한기총 ․ 156 한기총은 왜 탄생했는가? ․ 158


제6장 김영삼 | 개신교를 휘어잡은 ‘장로 대통령’
3대를 이어온 ‘신앙 명가’ ․ 163 개신교의 ‘장로 대통령’ 만들기 ․ 166 개신교의 권력화 ․ 168 교회 성장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감리교 4형제’ ․ 172 대형 교회의 문어발식 성장 ․ 174 “검정고시 일자가 부활절과 겹친다” ․ 177 종교 차별 3대 사건 ․ 180 ‘사건 공화국’과 청와대 불상 ․ 182 청와대 벼락 사건 ․ 185 기독교회관, 명동성당, 조계사 ․ 186


제7장 김대중 | 개신교와 정권의 밀월 관계가 깨지다
고난을 버틴 힘, 천주교 ․ 191 한 지붕 두 종교 ․ 193 대형 교회 비리 보도와 ‘잃어버린 10년’ ․ 195 햇볕정책과 반공 ․ 197 조갑제의 ‘기독교 궐기론’과 거리로 나선 목사들 ․ 199 ‘지는’ KNCC, ‘뜨는’ 한기총 ․202 민중교회운동과 교회성장운동 ․ 204 국회조찬기도회, 정각회, 가톨릭의원신도회 ․205 ‘불교계를 위한 10대 공약’ ․ 206


제8장 노무현 | 정권 최대 정적은 보수 개신교회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 ․ 211 불화의 근원이 된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 ․ 214 개신교가 세운 대표적인 종합대학 ․ 218 사립학교법 논란의 기폭제가 된 ‘강의석 사건’ ․ 220 “반미 감정이 사라지게 하소서” ․ 222 개신교는 왜 미국에 우호적인가? ․ 226 개신교의 ‘정권 퇴진’ 운동 ․ 227 ‘기독교 정당’이 등장하다 ․ 230 기독교 정당의 역사 ․ 232


제9장 이명박 | 압도적 표차로 다시 탄생한 ‘장로 대통령’
어머니의 새벽기도를 듣고 자라다 ․ 237 개신교의 이명박 선거운동 ․ 239 뉴라이트와 한기총의 대활약 ․ 242 이명박 장로 대통령론 ․ 245 개신교가 움직이면 집권한다! ․ 247 ‘개신교 코드 인사’ 논란 ․ 249 지도에 ‘사찰’이 없다 ․ 251 역차별을 주장하며 역공에 나선 개신교 ․ 254 권력의 정점에 선 개신교 ․ 257 세대 교체가 불러온 개신교의 변화 ․ 259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의 공통점 ․ 261 개신교의 이미지 추락과 교세 하락 ․ 265


제10장 박근혜 | 가장 종교적인 무교 대통령
천주교, 불교, 개신교를 섭렵하다 ․ 271 소리 높인 ‘불교’, 조용한 ‘개신교’ ․ 275 ‘인수위원장’은 모두 개신교인이다? ․ 276 무교인 박근혜의 개신교인 중용 ․ 280 종교인 과세에 반발하는 개신교 ․ 282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개신교 ․ 285 기독신우회, 청불회, 청가회 ․ 288 군종제도의 변천사 ․ 290 교회의 파산 공포와 세습 논란 ․ 292


에필로그 | 종교의 미래를 위해 ․ 296
주 ․ 299
참고문헌 ․ 308



▣ 본문 중에서


기독교방송 개국 2년 뒤인 1956년에는 극동방송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선교사 파송이 불가능한 극동지역 주민과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신교 복음방송이었다. 그러니까 건국 이후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만들어진 방송이 모두 개신교가 운영하는 방송이었고, 또 이 두 방송은 이승만 집권기에 허가된 방송이기도 했다. KBS·MBC·TBC 등 공중파 3대 방송 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불교방송(불교)과 평화방송(천주교) 등 타종교 방송은 기독교방송이 설립된 지 36년이 지난 1990년에서야 설립되었다. 「이승만: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겠다”」(본문 44쪽)


개신교는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을 적극 지지하며, 전국적인 기도회를 열고 파병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파병부대인 백마부대 내에 개신교인들로만 구성된 ‘임마누엘 중대’, ‘다윗 중대’, ‘여호수아 중대’가 만들어졌다. 당시 백마 부대장이었던 이소동 대장 역시 개신교인으로, 부대 창설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소동은 1966년 8월 KNCC 주최로 열린 ‘파월 백마부대 환송연합예배’에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선한 싸움을 할 것”이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장병들을 보호해줄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정희: 반공과 친미로 절묘하게 만난 개신교와 군사정권」(본문 82쪽)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따른 정권의 정당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전두환에게 교황의 방문은 상당한 호재였다. 실제 전두환은 교황이 방한한 첫날 청와대에서 교황과 정상회담을 갖고 9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과 교황의 정상회담은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교황청이 군사정권을 도덕적으로 승인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교황의 방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전두환과 신군부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황이 광주를 방문해 광주 시민들의 깊은 상처를 위로하면서도 죄악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당근과 채찍을 겸비한 ‘국풍 대통령’」(본문 125쪽)


노태우가 가장 먼저 한 조치는 ‘전통사찰보존법’ 제정이었다. 이 법은 1962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사찰의 자율권 확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불교재산관리법은 주지 임명권만 각 사찰에 주고 나머지는 정부 규제 하에 두었다. 그러나 전통사찰보존법 시행으로 전통사찰로 지정된 곳만 정부가 관할하고 나머지 사찰은 정부 규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 전통사찰로 지정된 경우도 사찰의 수리와 보수 등 보존을 정부가 책임지도록 했다. 이 같은 조치는 사찰의 모든 권한을 통제했던 일제강점기 ‘사찰령’(1911)에서 진일보해 주지 임명권을 보장했던 ‘불교재산관리법’보다 사찰의 자율권을 확대한 획기적인 개선책이었다.「노태우: 개신교의 근간인 ‘친미’와 ‘반공’이 흔들리다」(본문 151쪽)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충현교회 장로인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개신교는 술렁였다. 이승만 이후 30여 년 만에 개신교인 대통령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와대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달라”, “교회 앞에서 선서하는 대통령이 뽑히게 해달라”, “이번 대선에서 하나님 믿는 자가 승리하게 해달라”는 구호가 넘쳐났다. 1992년 12월, 63빌딩에서 열린 ‘김영삼 후보 초청 조찬기도회’에는 1,000명이 넘는 목회자가 참석해서 개신교의 열띤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개신교의 ‘장로 대통령을 만들자’라는 구호는 개신교인들의 마음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김영삼의 개신교 사조직인 ‘나라사랑협의회’(나사협)의 역할이 컸다.……나사협은 선거 기간에 ‘나라를 위한 기도회’ 명분으로 김영삼을 위한 대교회 선전전을 펼쳤다. 「김영삼: 개신교를 휘어잡은 ‘장로 대통령’」(본문 167쪽)


『조선일보』의 ‘할 말’은 김대중 정부를 ‘좌파정권’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보수 개신교도 거리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보수 개신교를 대표하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김대중 정부가 싫다기보다는 이 나라가 공산화되면 우리가 예수를 못 믿고 다 죽게 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민주화운동에 눈감아왔던 보수 개신교의 화려한 변신이었다. ‘이제 할 말을 하겠다’는 보수 언론과 ‘이제 우리가 나서겠다’는 보수 개신교는 이렇게 연대했다. 어느새 광장의 주인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개신교와 정권의 밀월 관계가 깨지다」(본문 201~202쪽)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서자 개신교의 반공 집회는 더욱 열기를 띠어갔다. 한기총 등 300여 개 보수 단체는 2004년 10월 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10·4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를 갖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했다. 주최 측 추산 10만여 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에도 대형 성조기, 각종 피켓,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한사랑교회 김한식 목사는 설교를 통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고 강조했다. 김홍도 목사는 “대한민국은 간첩 천국이며 더이상 간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국 교회가 친공, 친북, 좌경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권 최대 정적은 보수 개신교회」(본문 223~224쪽)


개신교계는 더 노골적으로 이명박 지지 활동을 벌여나갔다.……6월 23일 개신교계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개최하고 노무현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7월 8일 주일예배에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신도 3만 명 앞에서 “(이명박 후보의 경우) 여자·사생아 (얘기도) 있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겠다, 마음 흔들리지 말고 나가야 한다”고 이명박을 두둔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 발언에 대해 선관위는 서면 경고를 내렸다. 7월 27일 열린 뉴라이트기독교연합 창립식에서 김진홍 목사는 ‘올 연말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실현하자’고 강조했으며, 최병두 목사는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기독교인을 대표해서 뉴라이트기독교연합의 지지 후보를 확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 압도적 표차로 다시 탄생한 ‘장로 대통령’」(본문 240~241쪽)


박근혜 정부 역시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인을 중용하면서 이른바 ‘교회 인맥’이 또다시 부상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랑의교회 인맥’이 주목받았다. 이 때문에 항간에는 소망교회 ‘지고’, 사랑의교회 ‘뜨고’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사랑의교회 인맥’의 대표주자는 박근혜 캠프에서 선거를 총괄한 김성주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이혜훈 부위원장이었다. 성공한 여성 실업가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랑의교회 집사로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사랑의교회의 한 인사는 “김성주 회장은 사석에서 오정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를 편한 호칭으로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증언했다. 박근혜와 오랜 기간 함께해온 이혜훈 역시 독실한 개신교인이다. 4대째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혜훈은 사랑의교회 신축 부지 허가 당시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내 교회 건축에 앞장섰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근혜: 가장 종교적인 무교 대통령」(본문 278~279쪽)



▣ 지은이 소개 __ 백중현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종교 전문지 기자를 거쳐 CBS 인터넷에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교계뉴스 팀장, 방송운영 팀장, 매체사업 팀장, 미디어사업 팀장을 거쳐 현재 CBSi 노컷뉴스 본부장 겸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종교 전문 기자 시절부터 ‘종교와 사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심도 깊은 취재를 해왔다. 특히 ‘대통령과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 연구 성과가 거의 전무했던,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개신교의 ‘김영삼 장로 대통령 만들기’를 계기로 “대통령과 한국 교회”라는 주제로 신문 연재 기사를 기획했다. 2007년 또 한 번의 ‘이명박 장로 대통령 만들기’를 보며 단행본 집필을 결심했다. 저서로는 국내 최초 북한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북한에도 교회가 있나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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