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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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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 대중문화로 보는 박정희 시대


지은이 이영미 | 쪽수 400쪽 | 판형 152×225(신국판, 무선) | 값 18,000원
분야 인문사회 > 대중문화사 | ISBN 978-89-5906-429-8 03900 | 출간일 2017년 2월 14일


키워드 : 동백아가씨, 아침이슬, 박정희,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조국 근대화, 잘살아보세, 국가비상사태, 포크, 장발족, 대마초, 히피, 트로트, 이승만, 땐스홀, 아프레걸, 자유부인, 날라리, 또순이, 김지미, 최은희, 이미자, 전쟁 영화, 〈팔도강산〉, 〈미워도 다시 한 번〉, 배호, 김민기, 양희은, 청년문화, 〈아씨〉, 〈여로〉, 트위폴리오, TV드라마


▣ 출판사 서평


박정희 시대, 대중문화의 욕망을 읽는다!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동백아가씨, 아침이슬, 조국 근대화, 잘살아보세, 국가비상사태, 포크, 장발족, 금지곡, 대마초, 히피, 트로트…….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를 무슨 생각과 느낌으로 살아갔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다. 또한 ‘박정희’와 ‘대중예술’이라는 조합은 우리에게 선입견을 준다. 대마초 사건이니 금지곡이니 하는, 박정희 시대에 이루어진 대중예술 통제 정책에 대한 뻔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대중예술 통제 정책은 그렇게 단순무식하지 않을뿐더러 대중예술이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도 단순하지 않다.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는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박정희 시대의 대중예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대중예술이라는 문화를 매개로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보고자 한다. 대중예술뿐만 아니라 문화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문화를 인간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으로 폭넓게 보기 시작하면, 역사를 문화로 읽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무슨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살펴보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대중문화나 대중예술은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대 대중의 선택이 어떻게 바뀌는지, 즉 대중들의 사회심리의 변화를 살펴보는 데에는 가장 좋은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물론 그 심층의 의미를 잘 분석해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대중예술 속에 대중의 사회심리나 민심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대중예술의 변화는 정치적·경제적 상황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예술의 유행과 인기의 변화가 정치사적 변화와 맞물려 나타나는 일은 우연이라 보기 힘들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비롯된 댄스 뮤직의 시대, 얼터너티브 록의 유행 등의 현상은 모두 1992년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해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가 함께 치러진 해로 더는 군인 출신 대통령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해진 해였다. 국제적으로는 소련 해체 직후였으니 국내와 국제의 정세가 모두 바뀐 시기였던 것이다. 1990년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용필의 인기 시대는 정확하게 전두환 정권의 시대와 일치하는데, 조용필의 노래가 전두환 정권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중예술로 역사를 읽어내는 일은 대중예술의 인기, 유행, 경향을 분석하고 이런 인기 경향을 만든 대중의 사회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사회심리는 그걸 즐기는 수용자 대중이나 인기작을 생산한 창작자도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심리를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것이야말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한 지점이다. 당대의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 읽기는 그 시대의 속살을 만져볼 수 있는 입체적인 역사 읽기이기도 하다.


『자유부인』과 시민혁명


1950년대의 대중문화와 풍속을 생각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사교춤이다. 1950년대는 최고의 화제작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과 영화 〈자유부인〉이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자유’라는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분단을 통해 남한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와 다른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국가라고 힘주어 이야기하게 되었고, ‘자유민주주의’는 ‘반공’과 함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들어 이 자유주의가 가장 먼저 철퇴를 맞았다. 박정희는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했는데, 5·16 군사쿠데타 직후 단행한 사교춤에 대한 철퇴는 그런 포퓰리즘의 한 사례였다. 박정희 정권은 오랫동안 무허가 댄스홀과 카바레의 주간 영업을 단속했다. 그러니 아직도 사교춤이란 말에서 ‘장바구니 카바레’를 연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그런 현상은 바로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1958년을 기점으로 이후 한두 해 동안의 잡지들은 급격히 풍속적으로 보수화된 논조를 보여준다. 오락적 대중지 『아리랑』과 『명랑』은 도시 남녀들의 ‘명랑 발칙’한 연애 이야기를 줄이고, 혼외 임신 등 연애의 후유증이나 건전한 부부의 미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수록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제적으로는 원조경제가 한계에 봉착해 극한적인 생활난에 부딪친 대중들의 불만이 터졌고, 정치적으로는 부정선거로 대표되는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적이고 탈법적 장기 집권 시도에 대한 불만이 터졌으며, 윤리적으로는 ‘사심 없는’ 학생들의 시위에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응한 정권의 비윤리적인 폭압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4·19혁명은 일어났다.


청년과 또순이, 희망을 노래하다


1960년대의 KBS와 CBS 라디오 방송극은 청취자가 요구하는 오락이나 방송저널리즘 등의 성격보다는 ‘국민계도’라는 보수적 성격의 메시지가 부각되는 예술이었다. 라디오 방송극은 세련되고 진취적이되 모범적이고 건전해야 하는 대중예술이었다. 그래서 1950년대 미국적 자유주의의 바람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수용하되 ‘아프레한 광풍’은 자제하는 방향의 온건하고 상식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영화 〈로맨스 빠빠〉는 세련되고 진취적이되 온건하고 건전한 라디오 방송극의 톤을 아주 잘 보여주었고, 영화 〈박서방〉은 늙은 아버지의 어리석음까지도 포용하는 능력 있는 장남의 모습을 그려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대중은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적 질서의 회복과 재구축 이상의 해법을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후에 등장한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근대적 기술을 갖고 성실히 노동하는 인간이야말로 이 시대 젊은이들이 나아가야 할 바임을 역설한다. 요즘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처럼, 이 시대 영화에서도 변호사나 의사는 멋진 직업으로 자주 나온다. 그런데 하얀 가운이나 작업복에 작업모를 쓰고 큰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혹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청년이 장래가 촉망받는 멋진 직업의 남자로 그려지는 것은 1960년대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렇게 근대적 기술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는 젊은이들이 심지어 개혁적이기까지 하다. 적폐를 청산하고자 고난을 자초하는 개혁적 인물이 이 시기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에 적잖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모두 생산과 노동과 개혁하는 청년들을 그려냈다.
또순이를 탄생시킨 작품은 1962년 KBS 라디오 드라마 〈행복의 탄생〉이다. 또순이는 아버지를 꼭 닮아 부지런하고 억척스럽다. 거친 함경도 사투리만큼이나 직설적인 성격의 또순이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결혼과 일에서 성공한다. 그럼 이토록 실용적 능력과 성실성, 진취성을 갖춘 또순이의 성공은 어떻게 귀결되었을까? 이 개혁적이고 당차고 실행력 있는 또순이는 성공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해도 남자의 보조자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남자는 사회적 노동, 여자는 가사노동이라는 종래의 성적(性的) 분업 개념에서 벗어난, 사회적 노동을 하는 여자들과 스스로 돈을 버니 다소 잘 차려입고 바깥 활동을 하는 여자들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여성에게 요구된 역할은 남성을 잘 보필하는 것이었다. 대중들도 듬직하고 추진력 있지만 결코 남자를 ‘이겨먹으려’ 하지 않는 성실한 맏며느리 같은 여자를 선호했다.


〈동백아가씨〉와 〈팔도강산〉


이미자의 대중가요 〈동백아가씨〉는 1960년대 초반의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솟아올랐다가 사라진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가 솟아올랐다가 사라진 과정을 뜯어보면, 민심의 흐름과 이를 고려한 집권자들의 ‘잔머리’의 향방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동백아가씨〉는 1960년대 초에 잠시 주춤했던 트로트 양식과 신파적 미감이 1960년대 후반에 다시 막강한 힘으로 떠오르게 되는, 그 분기점에 있었던 노래라 할 수 있다. 즉, 1964년에 〈동백아가씨〉의 ‘대박 히트’를 계기로 트로트는 부활의 기선을 쥐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시기에〈동백아가씨〉는 금지곡이 되었으니 그 이유는 ‘왜색(倭色)’, 즉 일본색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와 정착된 것인데, 겨우 몇 년 동안 주춤했던 이 경향이 보란 듯이 다시 솟아올랐다. 게다가 전주의 기타 반주는 일본 엔카의 거장으로 통하는 고가 마사오(古賀正男) 스타일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는 정부가 한일수교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해 온 사회가 술렁거리고 있던 때였다. 이런 여론의 흐름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것은 바로 대중가요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대중적이었으니 대표로 얻어맞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동백아가씨〉가 표적이 되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국 영화 중 가장 많은 최고급 스타를 총동원한 〈팔도강산〉은 ‘박정희 정권’의 홍보영화였다. 이 영화는 정치적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단연 독재정권의 홍보에 앞장섰다. 이 영화에서 노부부의 여행은 크게 두 가지 콘셉트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그 지역의 유명한 풍광이나 명승고적을, 또 하나는 개발 현장이나 공업화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다. 부부의 여행 코스는 정말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어메이징’했다. 특히 개발․산업화․근대화의 현장은 코믹한 노부부 덕분에 〈대한뉴스〉에서 보던 것보다 좀더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가 개봉된 것은 1967년 2월인데, 불과 3~4개월 뒤인 5월에 대통령 선거가, 6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대통령직은 4년 중임제였으니 박정희에게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재임을 위한 선거였다.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


1970년대 꽃을 피운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은 어떤 관계였을까? 1970년대의 포크는 이기적인 물욕․성욕 등에 대한 비판 성향의 작품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나름의 윤리적 태도를 견지했다. 이것은 1970년대에 진행된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점점 심화되었던 물신화와 비윤리성 등에 대한 비판과 통하는 지점이었다. 청년문화의 양상이 다양했고 시기에 따라 꽤나 변화했으며, 그중 어떤 부류는 정치적 진보성의 흐름과 무관했지만, 또 다른 소수는 충분히 연대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정권과 기성세대가 진보적 세력과 자유주의적 청년문화를 한꺼번에 탄압했다는 점이야말로 후일 청년문화가 진보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높인 요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70년대에는 민주주의 등 사회 발전을 향한 움직임들이 자유주의적 문화를 ‘조금은’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대학생과 청소년을 중심으로 전통문화나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실천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십 년 동안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문화의 식민주의적 성격에 대한 다소간의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시기 청년들의 ‘우리 것 찾기’ 붐은 훨씬 더 쉽게 확인된다. 이때부터 대학에서 탈춤반이라 통칭되는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대학생들이 판소리 감상회나 탈춤 공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년문화의 ‘버터 냄새’가 못마땅한 대학생들에게 전통예술은 명분과 재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전통문화 계승’과 ‘민주문화 창조’를 핵심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970년대에 방송사의 가요제까지 이런 소재가 우수수 등장할 정도로 전통 민속문화가 고학력 젊은이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 정치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학생운동의 주체들조차 청년문화의 껄렁대는 자유주의 문화와 개인주의적 감수성을 꽤나 못마땅해했다. 막걸리 집에서 정치나 민주주의, 자유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일삼던 그들은 개인의 섬세한 내면을 드러내는 ‘김민기의 노래’에 대해 그리 탐탁찮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보란 듯이 〈선구자〉나 〈스텐카라친(Stenka Razin)〉 같은 노래를 불렀다. 이 시대 청년문화는 한마디로 말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문화의 바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당시 청년들의 패션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남자의 장발은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방치해둔다는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헤어스타일이었다. 여자 패션은 더 많이 달라졌다. 미니스커트도 획기적이었는데, 심지어 ‘빤쓰’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핫 팬츠’라 불리는 반바지가 유행했다. 말하자면 유니섹스 스타일이다.


박정희 시대, 대중의 욕망은 무엇이었는가?



박정희 시대가 시작된 지는 벌써 60년을 향해간다. 끝난 지도 머지않아 40년이다. 한두 세대가 훌쩍 지난 것이다. 시간적 거리로 보자면 박정희 시대는 본격적인 역사 연구의 대상이다. 그런데 여전히 박정희 시대는 객관적이고 냉철한 태도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를 거치며 오히려 새롭게 실감으로 다가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며, 박정희 시대는 체험적 생생함과 감정적 호불호의 대상이 된다. 그 시대가 지닌 중요성과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대중가요 관계자들은 ‘1970년대에 대마초 사건이 없었더라면, 한국 대중가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4~1975년에 절정에 도달한 청년문화가 그해 12월의 대마초 사건이 없었다면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을 것이라 보는 것은 다소 순진한 생각이다. 청년문화의 유행이 대도시의 고학력 청년들에게 한정된 현상이었다. 어찌 보면 대마초 사건으로 대표되는 정권의 여론몰이가 그럭저럭 먹힐 수 있었던 것도 청년문화 취향 바깥에 결코 적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신 말기의 대중문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진보적 대중문화의 본격적 형성이다. 특히 민중가요라는 노래문화가 대표적이다. 이 민중가요 문화의 출현이란 진보적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가 출현했다거나, 혹은 시위 현장에서 노래가 불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어느 시위 현장에서나 노래는 존재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행진을 하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일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유신 말기의 폭압적인 상황은 젊은이들을 어느 방향으론가 몰고갔고, 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후 한국 예술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만든 것이지만, 그 여파는 전두환 시대를 거쳐 노태우 시대까지 이어졌다. 박정희가 뿌린 씨앗을 노태우가 허덕거리며 거두고 있었다. 심지어 박근혜까지 그 몫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니 역사란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것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 차례


머리말 :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 5


프롤로그 : 박정희 시대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 12
박정희 시대를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 박정희 시대의 대중문화? 그 질긴 선입견 | 문화로 역사를 읽는다는 것 | 대중문화로 당대의 사회심리를 읽는다 | 어쩌면 이렇게 딱딱 들어맞을까! | 박정희 시대의 사회심리


제1부 혁명과 정변, 그 격변의 시기를 향하여


불안정하고 어설픈 1950년대 ․ 27
“한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 대중예술사에서 1960년대는 확실히 새로운 시대 | 1950년대 한국에 웬 인도와 페르샤? | 미국을 중심으로 ‘상상지도’를 그리다


자유부인만 춤을 춘 건 아니다 ․ 40
조직폭력배와 TV와 쿠데타 | 서울에 땐스홀을 허하라? | 춤추는 것이 죄인가? | ‘자유’, 그 가슴 벅차고도 불편한 말 | 전쟁, 그것은 자유와 해방의 계기 | ‘아프레걸’이라는 신조어 | ‘자유부인’만? 그 남편들도 다르지 않았다 | 여론의 공격은 ‘남자 어른’에게 불편한 곳으로 향한다


날라리들이 시민혁명을 일으켰다 ․ 60
“어머, 전직 대통령들이 살아 있다니!” | 대통령이 양녕대군 16대손임을 들추던 시대 | 서울 장안 처녀 6할이 처녀성 상실? | 잡지에 대한 단속, 풍기 문란과 공안의 물 타기 | 자유주의적이면서 ‘아프레하지’ 않은, 온건한 절충 | 날라리들이 혁명을!


제2부 격변의 시기, 개혁과 희망


영화로 확인되는 4·19와 5·16의 연속성 ․ 79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종종 헷갈린다 | 4·19와 5·16은 종이 한 장 같은 차이? | 4·19와 5·16, 대중예술 작품의 연속성 | 합리적으로 도전적인 아들과 관용적인 부모 | 늙은 아버지가 초래한 가부장제의 위기 | 늙은 아버지의 어리석음까지도 포용하는 능력 있는 장남 | 당시의 민심은 무엇을 바라고 있었을까?


개혁의 청년이여, 근대적 기술로 성실히 일하라 ․ 100
4·19와 5·16 사이, 어떤 작품을 기억하는가? | 날라리에서 노동하는 인간으로 | 근대적 기술자, 하얀 가운과 작업복 | 생산, 노동, 개혁하는 청년 | 민심에 올라탄 5·16 정권


또순이는 돈을 모아 사장이 되었을까? ․ 116
‘또순이’란 말을 아시나요? | 이승만이 아니라 박마리아가 문제? | 당찬 여성이라도 남성의 보조자 | 돈 버는 여자를 유한마담과 동일시한 시대 | 일제 말의 일하는 여성과 달라진 지점 | 강해진 여자들 | 최은희 VS 김지미 | 김지미와 최은희는 모두 1960년대에도 살아남았다


제3부 ‘잘살아보세’의 희망과 역사라는 난제


자신의 역사를 갖고 싶은 욕망과 그 이면 ․ 135
언제 나온 노래일까? | 역사는 ‘구성’하는 것이다 |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폭증하는 때 | 사극의 중심은 늘 조선시대였다고? 천만에! | 궁궐이 세트장이 된 시대 | 가족물·연애물의 문법으로 읽힌 역사 | 6·25 소재 전쟁 영화의 전성시대 | 미군이 사라진 6·25전쟁 | 멋진 국군, 멋진 전쟁 | 국군인 듯 국군 아닌, 국군 같은


응답하라 1945 ․ 156
일제강점기 눈물의 트로트는 ‘나라 잃은 설움’ 때문이다? | 과도한 민족주의적 해석은 1950년대부터 | 구한말과 3·1운동에 집착하는 영화들 | 치욕스런 역사를 다룬 이유 | 복고 열풍은 왜 부는가? | 다큐드라마와 ‘만주 활극’의 인기 | 마적과 독립운동가가 뒤엉킨 만주 활극 | “내가 왜정 때 만주에서 개장사 할 적에”


〈동백아가씨〉 토사구팽 전말기 ․ 178
일장기는 봐줄 수 있는데 〈기미가요〉에는 파르르 | 늘 분노하기만 하는 ‘반일 감정’ | 트로트 부활을 견인한 〈동백아가씨〉 | 한일 대중문화 교류는 예정된 수순이다? | 트로트의 왜색 시비 재연 | 리요시코의 〈사랑의 붉은 등〉 | 방송 금지곡의 순조로운 일본 진출 | 〈동백아가씨〉는 언제 금지곡이 되었는가? | 한일 대중문화 교류는 물 건너가고 | 팽 당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 198
염장 지르는 노래 | 횡재 아니면 들어먹기 | ‘빽’ 없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가난했던 1950년대 | 착실하게 돈 모으니, 쥐구멍에도 볕이 든다 | 가불로 살지만, 나는야 성실한 월급쟁이 | 부잣집 딸과의 사랑을 꿈꾸는 영화들 | 고속성장의 시작, 그리고 50년 후


제4부 몰아붙이니 밀려가면서도 ‘미워도 다시 한 번’


〈팔도강산〉은 독재정권의 노골적인 홍보영화였다 ․ 217
1967~1968년, 민심의 바람이 바뀌다 | 정치사와 맞물리는 대중예술사의 변화 | 조국 근대화 유람하기 | 이런 ‘어메이징’한 여행 코스라니! | 이들은 왜 여행을 했을까? |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장편 극영화 ‘광고’ | 대통령 선거 직전에 전국적 무료 관람 | 이승만 정권 때와 같은 점 혹은 다른 점 | ‘탄신’ 축하 노래를 지어 바치던 때와는 달랐다 | 대통령을 내세운 홍보성 행사의 변화 | 갑자기 많아진 주문 제작 건전가요 | 대중들의 동의를 구하던 마지막 시기


성장과 희망에서 배제된 자들과 〈미워도 다시 한 번〉 ․ 236
한국 영화사의 최고 기록 갱신 | 평론가들이 뭐라 하건 간에 | 손발 오그라드는 걸 꾹 참고 | 남편들의 불륜은 늘 있어왔건만, 왜 하필 이때에? | 희망의 거품이 살짝 꺼진 1963~1964년 | 1967~1968년, 민심의 바람이 또 바뀌다 | 성장의 혜택, 모두가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 신파적 작품에 나타난 시골과 변두리 | ‘잘살아보세’ 바람에서 배제된 ‘시골’


어느 시대나 삐딱한 젊은 것들은 있었다 ․ 254
저음 가수 배호의 매력 | 듬직하고 안정감 있는 남자 가장 | 울고 싶은 세상인데도 저항적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 김기팔이란 작가를 기억하는가? | 불쌍한 아버지? 바로 아버지가 문제야! | ‘피해자 코스프레’ 좀 하지 마! | 무책임한 중년 가장과 풍비박산의 가정 | 작가의 삐딱함에 호응해줄 대중


제5부 종신 집권과 대학생과 청년문화


청년문화는 왜 하필 1970년대였을까? ․ 275
이식론, 자생론, 혼종론의 소모적 대립을 넘어서 | 한국의 ‘엘비스와 비틀스 바람’은 언제부터인가? | 한국 최초의 포크와 록 음반 | 한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베이비부머 | 청년문화, 포크, 대학생 | 판이 뒤집힌 1971년 | 국가비상사태와 〈아침이슬〉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은 어떤 관계였는가? ․ 293
데모꾼들은 ‘김민기 노래’를 즐기지 않았다 | 머리도 가방도 자유롭게 너펄너펄 | 새로운 자유주의적 문화에 대한 각 시대의 대응법 | 자유주의적 신세대 문화가 민주주의와 손잡은 1990년대 | 히피, 민주주의, 한국의 청년문화 | 청년문화의 중심, 록이 아닌 포크였던 이유 | 자유주의 문화가 ‘조금은’ 숨 쉴 수 있었던 1970년대


드라마 〈아씨〉와 〈여로〉의 히트가 의미하는 것 ․ 311
트윈폴리오 노래와 이미자 노래, 어느 것이 먼저인가? | 대중가요가 가장 먼저, 그리고 소설과 영화 | 복고 경향을 보인 TV드라마 | 드라마 〈아씨〉에 전 국민이 감동했다고? | 〈아씨〉·〈여로〉에 대한 묘한 여론 | 전근대적이어서 근대적 조국의 주체가 되었다는 역설 | 너희 젊은이들도 순종하고 노력하면


서양적이어서 더욱 한국적일 수 있었던 청년들 ․ 328
나 영어 잘하는데, 이건 아냐! | 〈새타령〉과 〈타복네〉의 간극 |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탈춤·판소리 붐 | 장발에 탈을 쓰고 ‘얼쑤!’ | ‘박정희 나라님 잔 뺏기 공차기 누가 누가 잘하나’ | 민족문화와 박정희와 대학생 | 활주로의 〈탈춤〉은 어떻게 봐야 하나?


청년문화에 여성의 자리는 있는가? ․ 344
‘구원의 여성’과 ‘여사친’ | 이들은 ‘여류’가 아니다 | ‘여사친’ 이미지의 씩씩한 여자 가수 양희은 | 신비화된 여성 이미지 | 소녀, 성녀, 창녀? | 더디지만 분명히, 사람이 되어간 여자들


대마초 사건, 그 화려한 스리쿠션 ․ 359
수상하게 과도한 사건 | 그들은 몇 년 징역형을 받았을까? | 도대체 왜 대중음악인만 탄압했을까? | 권력자들이 비상식적이고 황당한 판단력을 지녔다고? | 대마초 사건은 저항에 대한 탄압이었나? | 저항 혹은 퇴폐? 무엇을 노린 것일까? | 날라리부터 데모꾼까지 싸잡은 이유 | 화려한 ‘스리쿠션’


에필로그 : 1975년 그 이후, 유신 말기의 나비효과 ․ 376
거품은 가라앉았다 | 처참한 대중예술계 | 공백은 메워지고 청년들은 성장한다 | 〈아침이슬〉은 어디로 갔을까? | 창작자도 가수도 아닌, 수용자가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 | 10월 유신 덕분(!)에 | 진보적 예술 문화 운동의 주체들, 1975년에 성장하다 | 사라지는 것은 없다


주 ․ 394



▣ 본문 중에서


이 시대는 정신없고 어쩔 수 없이 어설펐다. 대중들도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참 버거웠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대중들이 자신의 머릿속에 그렸던 세계의 상상지리는 아시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은 아주 달라졌고, 아시아를 훌쩍 뛰어넘어 미국과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상상적 지형도를 그려야 했으니 아주 바쁘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어설픈 아시아적 이국성의 노래들은 대중의 시야에서 싹 사라진다. 10년도 안 된 시간 안에 이루어진, 놀랍게도 빠른 변화다. 박정희 시대는 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과 맞물려 있다. 「불안정하고 어설픈 1950년대」(본문 38~39쪽)


『자유부인』은 이러한 대학교수 부부의 세태를 ‘사바사바’, ‘뒷돈’을 먹고사는 공무원, 부자 스폰서와 공생하는 국회의원, 심지어 돈 봉투를 들이밀며 성적을 올려달라는 대학생과 이를 받아 챙기는 교수 부인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인간들과 버무려놓는다.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 황산덕이 『자유부인』을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비난한 것은 단지 춤바람을 다룬 까닭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갖은 재롱을 다 부려가며 대학 교수를 모욕’했다는 분노 어린 표현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교수 부인의 타락을 그린 것뿐만 아니라 이 소설이 소설 속에서 가장 도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장태연 교수마저 ‘미스 박의 하얀 종아리’에 한눈을 파는 인물로 그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부인만 춤을 춘 건 아니다」(본문 57~58쪽)


5·16을 경유하면서 이 흐름을 5·16 정권의 것으로 귀결시키고자 하고, 여기에 근면·성실의 흐름을 더욱더 강조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시도는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영화 〈쌀〉(신상옥 감독, 1963)이다. 귀향한 상의군인 차용(또 신영균이 맡았다)은 마을 사람 모두가 기아에 허덕이는 지독한 가난은 농사지을 물이 없어 땅의 태반이 황무지로 팽개쳐져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바위산에 굴을 뚫어 황무지에 물을 대고자 마을 청년들을 설득해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일에는 오로지 곡괭이만으로 바위산에 굴을 뚫는 물리적인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 유지인 지주 송 의원은 소작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해 자영농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회한 방해 공작을 편다. 심지어 무당을 사주해 ‘산을 건드려 산신령이 노했다’며 마을 사람을 선동하도록 한다. 「개혁의 청년이여, 근대적 기술로 성실히 일하라」(본문 111~112쪽)


그것은 현실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대중은 영화 속에서 이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꽤나 좋아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영화 속 현실’이 ‘진짜 현실’보다 좀더 멋진 모습으로 가공되어 고통과 어려움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현실을 그리 나쁘지 않은 것으로 다소 기분 좋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위로야말로 대중들이 대중예술을 즐기는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오히려 열악한 현실을 지독할 정도로 리얼리티 넘치게 그려낸 작품은 대중들이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 세계가 이미 힘들어 죽겠다 싶은데, 영화에서까지 그 고통을 재확인하려 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1960년대 전쟁 영화가 지닌 미국적인 질감이야말로 현실 속에서 체험한 고통을 다소 휘발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다. 대중은 이런 영화가 주는 위로 효과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갖고 싶은 욕망과 그 이면」(본문 154쪽)


대중가요계가 이렇게 발 빠르게 강경한 대응을 했던 것은 이미 이 문제가 10년 전부터 누적·반복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6년에 김성태·나운영 등 본격 음악인들이 모여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면서 왜색의 트로트와 양풍의 재즈를 불건전한 음악으로 비판했다. 이에 트로트를 주 양식으로 하고 있던 대중음악인들이 모여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집단행동을 했고, 이를 계기로 ‘대한레코드작가협회’까지 결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에도 트로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왜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트로트를 해왔던 사람들로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왜색’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대중가요인이 아닌 본격 음악 작곡가이거나 양풍이 강한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자면 그네들이 하는 음악도 ‘한국색’은 아닐진대, 유독 자신들만 ‘왜색’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확실히 대중음악인, 그중에서도 대중적인 트로트를 해온 사람들을 깔보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는 것이다. 「〈동백아가씨〉 토사구팽 전말기」(본문 187~188쪽)


왜 이 여자들은 서울 남자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될까? 아니, 왜 서울 남자들이 시골에서 섬 처녀와 행복하게 산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답은 명확하다. 근대화가 보장해주리라 믿었던 행복은 시골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의 가사는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지만, 그 ‘총각 선생님’이 ‘섬 색시’를 서울로 데리고 가 결혼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 아니겠는가. 그러니 핵심은 ‘희망’이 서울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시골은 ‘잘살아보세’ 바람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무작정 상경’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이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를 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섬과 육지를 가로막은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절망적 심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성장과 희망에서 배제된 자들과 〈미워도 다시 한 번〉」(본문 251쪽)


청년문화의 흐름은 이를 향유하던 청(소)년들의 엄청난 자부심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입만 열면 ‘왜정 때’와 ‘6·25 동란 때’ 이야기만 해대는 어른들에 비해 자신들이 훨씬 똑똑하고 근대적이며 건강하다는 자부심 말이다. 청년문화의 대중가요적 흐름에서 유독 ‘대학생’이 강조되어 드러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대중예술 감수성의 변화는 도시에 살던 여러 계층과 여러 학력의 청소년들에게 모두 나타나고 있었고, 실제로 당시 대학생의 여론이 청년문화에 대해 호의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청년문화가 대학생 주도의 문화로 단순화되어 이해되고 실제로 대학생(혹은 대학 출신) 연예인이 승승장구한 것은 어른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학력을 지님으로써 기성세대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대놓고 무시할 정도로 문화적 자부심이 넘쳤던 베이비부머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청년문화는 왜 하필 1970년대였을까?」(본문 286쪽)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대놓고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용기 있는 그들에게 때때로 박수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박정희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한 채 청년 특유의 혈기방장함에서 비롯된 저항적 포즈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장발을 하건 기타를 두드리며 다소 건방을 떨건, 박정희 정권이 이들을 포용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이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지 않는 이상 이들의 문화적 자유주의를 그저 모른 척하고 포용했더라면, 청년문화적 대중예술의 평범한 팬이었던 이들까지 ‘정권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라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경직되기 시작한 박정 희 정권은 그러지 못했다. 성향도 위상도 전혀 다른 김민기와 이장희와 신중현이 같은 해(1975년)에 퇴출되었다는 것은 후일 한국의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의 복잡한 관계를 실제보다 과장되게 혹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하도록 했다. 「청년문화와 정치적 진보성은 어떤 관계였는가?」(본문 309~310쪽)


청년문화의 ‘버터 냄새’가 못마땅한 대학생들에게 전통예술은 명분과 재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들뿐이었을까? 미국과 서구의 새로운 조류에 민감하며 기성세대의 촌스러움에 반감을 가진 ‘세련된’ 취향의 대학생들 역시 민족주의의 명분에는 충분히 공감했고, 전통예술은 이들의 세련된 미감을 만족시킬 만큼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월남 갔다 와 영어만 하’는 기성세대들의 예술에 비하면 훨씬 더 수준 높고 멋지며, 게다가 정당한 명분까지 지닌 것이었으니 말이다. 기타도 치면서 단소까지 배우는 것은 정말 세련되고 멋진 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저항과 함께 기성세대에 의해 유린된 법질서와 전통 을 바로 세울 과제까지 떠안은 ‘아이러니 세대’라는 신학자 안병무의 1969년 발언은 아주 적확한 것이었다. 「서양적이어서 더욱 한국적일 수 있었던 청년들」(본문 335~336쪽)



▣ 지은이 소개__ 이영미


1961년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1920년대 대중화 논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밟는 대신 마당극과 민중가요가 공연되고 향유되는 진보적 예술문화운동과 대학로 연극계에서 평론가와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예술의 대중성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켰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했고, 학교를 그만둔 후부터는 성공회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중예술에 대한 연구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대중예술본색』,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 『한국 대중가요 속의 여성』, 『요즘 왜 이런 드라마가 뜨는 것인가』, 『구술로 만나는 마당극』(전5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 『광화문 연가』,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 『한국대중가요사』, 『서태지와 꽃다지』 등이 있고, 『김내성 연구』, 『정비석 연구』,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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