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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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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
- 사상, 이론, 그리고 삶의 궤적


지은이 강준만 | 쪽수 492쪽 | 판형 152×225(신국판) | 값 20,000원
분야 인문사회 > 인물론 | ISBN 978-89-5906-432-8 93300 | 출간일 2017년 3월 6일


키워드 : 커뮤니케이션, 월터 리프먼, 조지프 매카시, 마셜 매클루언, 자크 엘륄, 머리 에덜먼, 조지 거브너, 레이먼드 윌리엄스, 앨빈 토플러, 백남준, 테드 터너, 저널리즘, 민주주의, 매카시즘, 메시지, 미디어, 프로파간다, 상징 조작, 보수화, 미래학자, 프런티어 자본주의, 포퓰리즘, 테크놀로지, 참여 민주주의, 비디오아트


▣ 출판사 서평


커뮤니케이션은 노력할 때 가능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라틴어인 communis(공유)와 communicare(공통성을 이룩한다 또는 나누어 갖는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공통(common) 또는 공유(sharing)라고 하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공통의 것을 갖게 한다(to make common)’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이 서로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이해에 도달하고 합의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공동체의 규범으로서 문화를 창출하는 걸 가리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이지만, ‘커뮤니케이션 사상가’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 누구든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거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관행과 관련해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면, 그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사상 또는 커뮤니케이션 사상과 관련된 행동은 탐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는 바로 그런 탐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인물 가운데에 어떤 인물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사상을 직접 역설하기도 했지만, 어떤 인물은 단지 행동만 했을 뿐이다. 이 책은 그런 행동가들의 행동을 촉발시킨 생각이 무엇이며 그 행동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그들을 커뮤니케이션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상가들은 월터 리프먼, 조지프 매카시, 마셜 매클루언, 자크 엘륄, 머리 에덜먼, 조지 거브너, 레이먼드 윌리엄스, 앨빈 토플러, 백남준, 테드 터너 등 모두 10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할 때 가능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 저널리즘이 민주주의를 결정하는가?: 월터 리프먼


월터 리프먼에게 신문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제도였다. 언론인들도 스테레오타입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문제 삼은 리프먼은 여론이 언론에 의해 형성되기보다는 언론을 위해 형성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밝혀내는 독립적인 전문 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대안은 여전히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이기는 하지만 계속 고민의 대상으로 삼을 가치는 있다.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긴 했지만 리프먼은 자신의 대안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해 보였다. 그는 저널리즘이 단지 자질구레한 사실의 집합을 나열한 ‘게시판’이 아니며 무언가를 분석해 설명하고 아디이어를 포용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칼럼에 소문과 가십을 다루지 않았다. 고위 관리들의 말이 바이블이라도 되는 양 인터뷰에 크게 의존하는 다른 칼럼니스트들의 방식을 전면 거부했다. 다른 언론인들이 이벤트의 포로였던 반면에 그는 매우 원대한 시각과 전망을 보여주었다.
언론인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인 것 같지만 그건 축적된 지식과 폭넓은 안목이 없이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목표다. 오늘날 한국 언론에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변덕스러운 이벤트들의 나열과 출몰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들을 오히려 지배하는 분석력과 통찰력이 아닐까? 뉴스 출처, 즉 권력자들의 여론조작 시도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기에 그러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자기 자신의 작업에 스스로 끊임없는 이의를 제기하고 아무리 작을망정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꿈꾸는 야망이 언론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리프먼은 가르쳐주고 있다 하겠다.


왜 정치는 ‘상징조작의 예술’인가?: 머리 에덜먼


방송규제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사 조직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머리 에덜먼의 관료제 조직의 상징성에 관한 분석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중에 대해 끊임없는 ‘위협’과 ‘재확약’을 제공함으로써 변화의 환상에 근거한 보수적 입지를 강화하는 관료제 조직이야말로 ‘정치=상징’을 가능케 하는 안전판이 될 것이다.
정치언어에 관심이 있는 언론학자들도 에덜먼을 빼놓고 갈 수는 없다. ‘정치=상징’을 밝히기 위한 그의 분석은 정치언어의 기만적 사용과 그 가공할 효과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정치언어는 매스미디어라는 확성기를 통해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언어 연구는 곧 매스미디어 연구이기도 하다. 또 정치언어는 반드시 정치인들의 언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스미디어의 언어를 의미하기도 한다.
에덜먼의 정치관은 언론학에 대단히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건 정치학과 언론학의 합일을 의미한다. 정치와 언론을 분리시켜 연구하는 접근 방법으로 현대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그런 분업을 천연덕스럽게 해내고 있다. “나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언론에 대해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이 이미지 정치에 무관심하다면 결국 언론학자들이 그 분야를 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학자들이 연구 영역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시대적 상황에 의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직도 우리 학계에서는 연구 주제를 좁고 깊게 파들어가는 것만이 학자의 옳은 태도라는 발상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만큼 그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다소 딱딱하긴 하지만, 알아듣기 쉬운 말로, 다양한 사례를 열거해가며 논지를 전개하는 에덜먼의 책들은 읽는 재미가 제법 있다. 그의 책을 읽고 학문의 현실 적합성을 경멸한 채 학문의 상징적 사용에만 집착하는 ‘상아탑’의 신화를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에덜먼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왜 미래학자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선지자가 되는가?: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는 ‘보수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불린 이른바 ‘깅리치 혁명’의 주역인 뉴트 깅리치의 영웅이었다. 평소 토플러의 저서를 열광적으로 애독하면서 토플러의 팬이 된 깅리치는 토플러도 참여한 ‘진보와 자유 재단’을 이끌면서 정보혁명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로 변신했다.
토플러가 누린 인기는 그의 탁월한 안목과 더불어 그의 메시지가 갖고 있는 정치성 또는 종교성과 무관치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할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모든 미신의 뿌리는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했을 때에 초점을 맞추지 빗나갔을 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했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폴 웰스는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두고 이런 굉장한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데 무척 솜씨가 좋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예전에 그렇게 확신했던 것들을 잊어버리는 데도 무척 솜씨가 좋다”고 했다.
적중한 예측은 눈여겨 살피고 실패한 예측은 잊어버리는 현상은 심리학에서 ‘포러 효과(Forer effect)’ 또는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물론 미래학의 인기를 그런 심리적 현상으로 보는 건 매우 부당한 일이겠지만, 토플러와 같은 일부 슈퍼스타 미래학자들이 누리는 인기의 비결은 그런 심리적·종교적 현상이기도 하다는 걸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미래에 대한 불안의 공포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토플러와 같은 ‘디지털 선지자’들의 복음을 통해 일부나마 그런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랴. 모두가 다 이 세상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차례


머리말 : “커뮤니케이션은 노력할 때 가능해진다” ․ 5


제1장 월터 리프먼 : 왜 저널리즘이 민주주의를 결정하는가?
“찰나적인 것을 통해 영원을 보도록 했다” 17 | “정치란 인간의 삶처럼 본질적으로 비합리적 현상” 19 | ‘노동 숭배’와 ‘민주주의 숭배’에 대한 비판 21 | ‘신문은 민주주의의 성경’ 25 |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를 뒤흔든 『여론』 27 | 저널리즘과 미디어 연구의 초석을 놓은 『여론』 30 | 철학자 존 듀이의 진보적 반론 32 | “공중은 유령이다” 34 | “오늘은 리프먼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36 | 리프먼은 과연 돈 때문에 타락한 걸까? 39 | 왜 드골은 리프먼의 『공중 철학』에 감격했는가? 41 | 텔레비전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매춘부’인가? 44 | 12명의 미국 대통령들과의 교제 45 |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형태의 타락은 권력자들과의 친분” 47 | ‘저널리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 50


제2장 조지프 매카시 : 왜 언론은 매카시즘의 공범이 되었는가?
매카시즘을 탄생시킨 조지프 매카시 57 | 반공의 ‘정치적 상품화’ 59 | 6·25전쟁으로 날개를 단 매카시 62 | 매카시의 든든한 ‘빽’은 여론이었다 64 | CBS-TV 에드워드 머로와 매카시의 대결 68 | 매카시의 몰락을 부른 ‘육군-매카시 청문회’ 70 |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의 기회주의적 배신 72 | 매카시는 과연 반공 광신도였나? 75 | 매카시와 케네디 가문의 밀월 관계 78 | 매카시즘은 ‘우파 포퓰리즘’이었는가? 80 | 매카시를 두려워한 미국 언론 82 | ‘20세기 미국 역사상 가장 탁월한, 최악의 선동꾼’ 85 | 매카시의 “이 손안에 있소이다” 수법 87 | 매카시의 정치적 자산이 된 반(反)지성주의 89 | 매카시의 탁월한 언론 조종술 91 | 무분별한 객관주의 보도의 함정 94 | 매카시즘은 좌파의 ‘마지막 피난처’인가? 98


제3장 마셜 매클루언 : 왜 미디어가 메시지인가?
‘디지털 혁명의 시조’로 추앙 받는 매클루언 103 | 매클루언은 ‘지배계급의 앞잡이’였나? 106 | 미디어는 ‘인간의 연장(延長)’이다 108 | 미디어는 단순한 전달 도구가 아니다 111 | 왜 미디어는 마사지인가? 114 |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 117 | 왜 리처드 닉슨은 존 케네디에게 패배했는가? 120 | 매클루언은 ‘우스꽝스러운 기술결정론자’인가? 124 | 기술결정론 논쟁은 수사학적 논쟁 126 | “인과적 관계를 말하면 무조건 결정론인가?” 128 | 매클루언에게 열광한 광고인과 방송인 131 | 종교적 열광과 혹독한 악평의 공존 134 | 매클루언의 오만한 태도 137 | 디지털 시대에 화려하게 부활한 매클루언 139 | 매클루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141 | ‘지식인은 활자매체의 포로’ 144


제4장 자크 엘륄 : 왜 프로파간다는 일상적 삶의 조건이 되었는가?
엘륄의 다중 정체성과 다작 149 | 마르크스가 20세기에 살았다면 어떤 책을 썼을까? 151 | 미국에서 더 인정받은 프랑스 지식인 153 | 테크놀로지와 민주주의의 위기 156 | 정보와 프로파간다의 합일화 현상 159 | “프로파간다는 일상적 삶의 조건이다” 161 | “알파벳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가 아니다” 163 | “대중은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환상을 원한다” 167 |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 169 | “스펙터클과 찰나적인 것들이 시민을 지배한다” 171 | ‘시사적 인간’과 ‘역사의 가속화’ 175 | 엘륄은 ‘미래에 대한 증오자’이며 ‘기술공포증 환자’인가? 177 | ‘긍정적 비관주의’ 또는 ‘능동적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180 |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182


제5장 머리 에덜먼 : 왜 정치는 ‘상징 조작의 예술’인가?
현대의 주술(呪術)정치 187 | ‘정치의 상징적 이용’ 190 | “현대 정치학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192 | 정부의 기만성에 대한 절감이 낳은 ‘상징정치론’ 194 | “정치 언어는 정치 현실이다” 196 | 상징 조작에 불과한 리더십 198 | ‘정치적 스펙터클’과 ‘적의 창출’ 201 | 왜 극우와 극좌는 서로 돕고 사는 관계일까? 205 | ‘적대적 공생’을 위한 ‘증오 마케팅’ 207 | 정치학에서 실종된 ‘대중’의 복원을 위하여 209 | 에덜먼의 한국적 사용법 211


제6장 조지 거브너 : 왜 폭력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가?
우리는 옛날 로마인처럼 피를 뿜는 싸움을 원하는가? 217 | 폭력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거브너의 청년 시절 219 | ‘TV에서 묘사되는 폭력’에 대한 관심 222 | TV가 시청자의 ‘세상을 보는 눈’을 배양한다 224 | 폭력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내는 ‘사악한 세계 신드롬’ 226 | 배양효과 이론에 대한 반론과 비판 229 | “미국에서는 총이 영광의 상징이었다” 231 | ‘TV 폭력 규제법’의 제정 233 | 프로그램 경고문과 ‘브이 칩(V-chip)’ 236 | 끝이 없는 ‘TV 폭력 묘사’ 논쟁 238 | “기업이 아이들에게 문화의 스토리텔러가 되고 있다” 241 | 마르크스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어떤 책을 썼을까? 244 | 강력한 ‘사회 통제 메커니즘’으로 부상한 ‘도덕적 공황’ 246 | 만성적 현상이 된 한국의 ‘도덕적 공황’ 247 | 이젠 ‘친근한 세상 신드롬’이 문제인가? 250


제7장 레이먼드 윌리엄스 : 왜 미디어의 해방적 가능성을 포기하면 안 되는가?
한 영국 좌파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시선 255 | 속세를 무시하고 독선과 신비주의에 빠져 드는 문학에 대한 비판 257 | 700년간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된 웨일스의 역사 260 | 귀족주의적 교육 시스템에 편입된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 263 | 윌리엄스와 홉스봄이 케임브리지에서 느낀 위화감 265 | “대중은 없다. 대중으로 보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268 | “문화는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다” 270 | ‘공통 문화’와 ‘감정의 구조’ 273 | 문화적 변화를 통한 ‘장구한 혁명’ 275 | 테리 이글턴의 윌리엄스 비판 278 | ‘참여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281 | 윌리엄스의 문화유물론과 문화사회학 283 | 스탠퍼드 시절의 미국 텔레비전 연구 286 | 윌리엄스와 매클루언의 ‘아비투스’ 차이 288 | ‘지구촌’ 시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저항 291 |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문화적 진전은 가능하다” 294 | ‘매스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넘어서 ‘문화연구’로 298 | 미디어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았는가? 301


제8장 앨빈 토플러 : 왜 미래학자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선지자가 되는가?
“우리 모두는 시간적으로 변화한다” 307 | ‘위장취업’을 통해 터득한 새로운 글쓰기 철학 310 | 『미래의 충격』을 통해 탄생한 ‘하이테크 시대의 선지자’ 312 | 토플러의 신조어 생산과 대중화 능력 307 | 토플러는 ‘영리한 미래학자’ 317 | “나는 기술결정론자가 아니다” 321 | “좌우는 산업화 시대의 유물이다” 324 | 토플러의 글쓰기 방법 326 | “좌절은 죄악이다”는 선지자적 낙관주의 329 | 미디어의 ‘탈표준화’와 ‘탈대중화’ 331 | 왜 CNN의 테드 터너를 ‘제3의 물결’이라고 했나? 333 | 왜 토플러는 뉴트 깅리치의 영웅이 되었나? 336


제9장 백남준 : 왜 조지 오웰과 러디어드 키플링을 넘어서야 하는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란 무엇인가? 343 | 백남준은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산 세계인 345 | 우상 타파주의 작곡가 존 케이지와의 만남 348 | “팝아트를 죽여라!”고 외친 ‘문화적 테러리스트’ 351 |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다” 354 | “‘음악의 D. H. 로런스’가 필요하다” 357 | ‘비디오아트의 조지 워싱턴’ 359 | ‘즉각적인 지구 대학’과 ‘전자 초고속도로’ 구상 362 | 조지 오웰의 『1984』를 반박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 365 | 키플링의 인종차별주의를 반박한 <바이 바이 키플링> 367 | 35년 만의 귀국 일성, “예술은 사기다” 369 | ‘예술가는 소비문화의 전위대’ 372 | 백남준의 포스트모더니즘 375 | “예술엔 ‘건전한 하극상’이 필요하다” 379 | 백남준의 파벌주의·민족주의에 대한 거부감 381 | 백남준의 기술·언어·경제 결정론적 성향 384 | 백남준은 ‘행동하는 매클루언’ 389


제10장 테드 터너 : 왜 CNN은 ‘프런티어 자본주의’의 첨병이었는가?
‘CNN 효과’라는 신조어를 낳은 걸프전쟁 395 | 1976년 샛컴 위성 발사와 ‘슈퍼스테이션’의 탄생 398 | 1980년 6월 1일 CNN의 탄생 401 | CNN은 ‘위기 뉴스 네트워크(Crisis News Network)?’ 403 | 테드 터너의 CBS 인수 공략 407 | 미국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망친 우울증 410 | ‘시너지 효과’에 충실한 ‘소프트웨어’ 전략 413 | 터너는 ‘남부의 민속 영웅’ 415 | CNN 아시아 본부가 서울 대신 홍콩으로 간 이유 418 | “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껴보고 싶다” 421 | MSNBC와 폭스뉴스의 도전 423 | 재앙이 된 타임워너-AOL 합병 427 | ‘폭스 효과’에 압도당한 ‘CNN 효과’ 430 | 당파성이 장사가 되는 다매체·다채널 시대의 뉴스 시장 432 | 왜 CNN은 보도국을 애틀랜타에서 뉴욕시로 옮겨야 했나? 435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시작을 했다” 437 | 미국 기업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프런티어 자본주의’ 440


주 ․ 444



▣ 본문 중에서


언론인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인 것 같지만, 그건 축적된 지식과 폭넓은 안목이 없이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목표다. 오늘날 한국 언론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변덕스러운 이벤트들의 나열과 출몰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들을 오히려 지배하는 분석력과 통찰력이 아닐까? 뉴스 출처, 즉 권력자들의 여론 조작 시도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기에 그러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자기 자신의 작업에 스스로 끊임없는 이의를 제기하고 아무리 작을망정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꿈꾸는 야망이 언론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리프먼은 가르쳐 주고 있다 하겠다. 「제1장 월터 리프먼: 왜 저널리즘이 민주주의를 결정하는가?”」(본문 53쪽)


매카시의 든든한 ‘빽’은 여론이었다. 1954년 1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매카시의 지지도는 51퍼센트(반대 29퍼센트)였다. 이런 지지를 의식한 아이젠하워도 사적인 자리에선 매카시를 ‘부랑아(guttersnipe)’라고 비판했지만, 공적으론 매카시에 의해 놀아나기 일쑤였다. 그 꼴을 보다 못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아들라이 스티븐슨은 1954년 3월 6일 전국에 중계된 텔레비전 연설에서 아이젠하워가 매카시즘에 굴복했으며, 공화당은 정치적 성공의 공식으로 매카시즘을 채택했다고 비판했다. 그 비판은 결코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매카시가 해도 너무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거세게 터져나오고 있었다. 「제2장 조지프 매카시: 왜 언론은 매카시즘의 공범이 되었는가?”」(본문 67쪽)


엘륄은 프로파간다를 그 의도의 노출 여부를 중심으로 하여 ‘공개적(overt)’ 프로파간다와 ‘비공개적(covert)’ 프로파간다로 나눈다. 공개적 프로파간다는 ‘하얀(white)’ 프로파간다고 비공개적 프로파간다는 ‘검은(black)’ 프로파간다다. 그는 하얀 프로파간다가 검은 프로파간다의 유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말한다. 수용자의 경계심을 하얀 프로파간다로 해제시킨 뒤 검은 프로파간다로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엘륄은 또 프로파간다를 수직적 프로파간다와 수평적 프로파간다로 나눈다. 수직적 프로파간다는 매스미디어라고 하는 통합적 기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면 수평적 프로파간다는 거대한 대중조직에 의해 이루어진다. 「제4장 자크 엘륄: 왜 프로파간다는 일상적 삶의 조건이 되었는가?”」(본문 162~163쪽)


거브너의 배양효과 이론은 TV에 묘사된 폭력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었다. 거브너는 폭력이 TV 드라마의 갈등과 그에 따른 흥미성을 제공하는 데 가장 싸고 쉬운 방법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즉, “폭력물은 저렴한 상품”이라는 것이다. “폭력물은 대사를 번역할 필요가 없으며, 신디케이트를 통해 드라마 프로그램의 형태로 전 세계에 배급된다. 따라서 국내 배급을 위해서 만드는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수익성이 높다.” 물론 미국의 TV엔 폭력이 철철 흘러넘친다. 거브너가 조사한 1967~1968년 2주간의 샘플에선 사상자가 790명이 나오고 한 프로그램당 평균 5번의 폭력이 묘사된다. 거브너의 1976년 조사 결과는 더욱 놀랍다. 3대 TV 네트워크의 주시청 및 밤 시간대와 주말 낮 시간대의 드라마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의 74.9퍼센트가 폭력에 연루되어 있고, 10개 프로그램 중 9개가 폭력을 묘사하고 있으며, 1시간당 9.5번의 폭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제6장 조지 거브너: 왜 폭력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가?”」(본문 225쪽)


백남준은 “나는 예술 잡지는 잘 안 읽지만(미술 평론이라는 것이 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술 잡지는 많이 읽는다. 기술의 변화, 발전이 곧 내 작업의 변화, 발전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정보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나는 매일 10시쯤 일어난다. 아침을 먹고 난 후 『뉴욕타임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월스트리트저널』을 본다. 그러면 반나절이 다 간다. 신문 중독자인 셈이다”라고 말한다. 백남준이 테크놀로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테크놀로지를 적극 이용하는 건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들로 하여금 그를 비디오 분야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지목하게 만들었다. 테크놀로지가 우위를 점하는 비디오아트가 논리적 연결이 없는 단절과 불연속의 경험을 제공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제9장 백남준: 왜 조지 오웰과 러디어드 키플링을 넘어서야 하는가?”」(본문 376~377쪽)



▣ 지은이 소개__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 ‘증오 상업주의’와 ‘갑과 을의 나라’를 화두로 던졌고, 2014년에 ‘싸가지 없는 진보’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2015년에 청년들에게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는 ‘청년 정치론’을 역설했고, 2016년에는 정쟁(政爭)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가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한국 사회의 이슈를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힐러리 클린턴』, 『생각과 착각』, 『도널드 트럼프』,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공저), 『미디어 숲에서 나를 돌아보다』(공저),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흥행의 천재 바넘』,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독선 사회』,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생각의 문법』, 『인문학은 언어에서 태어났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교양영어사전』(전2권),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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