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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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지은이 박홍규 | 쪽수 492쪽 | 판형 152×225(신국판) | 값 19,000원
분야 인문사회 > 인문학 | ISBN 978-89-5906-443-4 03300 | 출간일 2017년 5월 19일


키워드 : 인문학, 그리스, 로마, 사람, 예술, 농사, 인문, 독재, 민주, 붓다, 제국, 평화주의자, 폴리페서, 공자, 권학, 민학, 권예, 민예, 페르시아, 헤로도토스, 아테네, 민주주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에피쿠로스, 로마인, 모세, 유대교, 가짜 인문학, 탐욕과 배신의 인문학,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 인간학, 인문의 르네상스


▣ 출판사 서평


탐욕과 배신의 인문학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우리는 인문학의 빈곤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CEO 상업 인문학이 이를 말해준다. 소수의 힘센 사람들이 CEO 교양이니 인문이니 고전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유행을 선도한다. 그야말로 귀족 인문, 강자 인문, 사치 인문이다. 반인간적인 물질주의가 판을 치고 있음에도 물질과 반대인 정신이나 인간을 중시한다는 인문 혹은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으니 더욱더 기이하다. 그들은 힘과 돈에다가 글과 문화까지 갖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부자가 권력자가 되고 거기다 명예박사까지 되더니 이제는 아예 인문학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는데도 사실은 반민주주의가 판을 치듯이 말이다.
가짜 인문학이 성업 중인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인문학은 타락했고, 인문학은 탐욕과 배신과 욕망에 물들었다. 대학에서 인문학과가 폐지되는 소동을 보면 우리의 인문이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우리의 교양이 얼마나 천박한지 알 수 있다. 이는 집단적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주장, 독선의 지양, 권력의 불의와 부정에 대한 사회적 분노, 약자에 대한 공감과 지원을 본질로 삼아야 할 인문학에 대한 배신이다. 특히 동서양의 지배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 없이 무조건 찬양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문학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인문학을 읽을 것인가?
『인문학의 거짓말』은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노예제를 인정한 과거의 계급적 문화인들, 가령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인문에 대해 그 노예제를 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약소국 침략, 남녀 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등 모든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모든 차별은 폭력으로서 폭력 자체와 함께 배제되어야 한다. 전쟁도, 국가폭력도, 국가주의도, 기타 모든 부당한 권력도 거부되어야 한다. 특히 진보는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보수 이상으로 굳은 신앙을 보여준다. 진보일수록 학벌이나 족벌이나 문벌 따위에 갇혀 산다. 그런 패거리 진보의 인문학에는 진보가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다. 인문이 모든 인간의 문화를 뜻하는 이상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특히 소수 인간이 다수 인간을 지배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비민주적 사상을 인문이라고 할 수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자를 가르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개탄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학으로, 역사로, 철학으로, 예술로 말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


인문학은 문사철, 즉 문학·사학·철학을 뜻한다. 문학과 사학은 서양인들이 문명이나 문화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철학은 그러한 문명을 반문명과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했다. 그런 요소나 기준에는 종교, 미술, 음악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도 각각 기독교, 프랑스 미술, 독일 음악을 최고로 여기는 가치의 차별화로 이루어진다. 도덕, 법, 기술 등도 문화나 문명에 포함된다면 인문에도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인문의 범위는 참으로 넓어지는데, 이에 대해 문사철은 학문의 기초라거나 왕자라는 지위를 주장하기도 하고, 그래선지 더욱 고답적이고 신비하며 난해하게 변하기도 한다. 가장 황당한 것은 외국어와 외국 문헌으로 치장해 읽는 사람들을 지극히 소수에 한정하여 자기들끼리의 은밀한 놀이로 타락시키고 극소수 전공자 이외의 개입을 철저히 막는 것이다. 그런 인문학의 반민주적인 비밀주의나 고급주의는 CEO의 사치로 타락한 인문학보다 더욱 타락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프리드리히 니체나 마이클 샌델에 이르는 반민주주의의 전통은 제국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그것들이 선진국 인문학이라면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이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아직도 통용된다. 그 단적인 보기가 서양이 비서양을 지배하기 위해 조작한 오리엔탈리즘인데, 더욱 심각한 점은 우리와 같은 비서양에서도 그런 오리엔탈리즘을 훌륭한 인문학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인문학이야말로 물질주의의 학문이다. 그런 인문학이 물질의 만능 시대에 유행하고 이를 CEO 등이 주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보다 반인문적인 행위가 있겠는가?
또 대기업이 대학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도 이상하기는커녕 바람직하다고 보는 지경이니 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산학협동이 아니라 산학일체, 더 정확하게는 산업에 대학이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대학이 있다. 자본은 최고의 권력이다. 지금 학문은 그런 자본의 권력에 봉사하는 권력학문이다. 우리의 학문, 특히 인문학의 악폐는 이러한 권력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문 특히 인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유가가 독점적인 권력학문이자 권력종교가 되는 것은 공자에서 시작되었고, 맹자를 거쳐 동중서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미셸 푸코는 ‘지식은 권력적’이라고 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유가와 유학은 권력 자체였다. 유가나 유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그러한 권력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국가나 종교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민학적인 인문학의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인문학은 인민학이자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 비판은 없고 찬양뿐인 사대 인문학을 참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은 서양 제국주의와 동양 제국주의를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부터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까지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부추기며 선동하는 인문학을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자유-자치-자연의 인문학


인문의 원리는 자유, 자치, 자연이다. 첫째, 신이나 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유에 전제되는 평등 역시 모두가 기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 모든 다양성이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인간들이 함께 사는 사회를 스스로 만든다고 하는 자치의 원리다. ‘나’라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이루는 작은 자치사회, 서로 지배하거나 종속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다스리는 자치를 원칙으로 하는 소규모의 사회생활을 이루는 것이다. 셋째, 모든 인간이 인류로 자연이라는 환경에 속한다는 원칙이다. 자연은 사회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사는 세계로 확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개인의 자유나 사회의 자치라는 것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조화되어야 한다.
그런 자유-자치-자연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여기서 자유란 자발, 자율, 자주로 타율과 반대다. 또한 개별, 개성, 단수로서 집단, 획일, 복수와 반대다. 나아가 자치는 통치의 반대이고, 자연은 기계와 반대다. 반면 구속과 방종, 타율과 억압, 인공과 제도만이 판을 친다. 바로 물질주의의 승리다. 생존을 위한 물질은 최소한으로 필요하지만, 오로지 물질적 가치에만 도취하는 물질지상주의는 문제다. 그런 물질주의의 승자만이 살 수 있는 곳이 한국이다. 그런 물질주의에 패하거나 그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스스로 물러서는 사람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 아닌가 하고 물을 정도로 우리의 물질주의 중독 상태는 심각하다. 그러니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유-자치-자연이라는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즉, 자유-자치-자연에 입각한 인문은 높이 평가되고, 그와 반대인 자유억압-권력통치-자연정복에 입각한 인문은 가차 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나’의 자유, ‘우리’의 자치, ‘세계’의 자연이라고 하는 3가지로 인류 문화인 인문이 구성됨을 뜻한다. 그런데 자유와 자치와 자연은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언제 어디서든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되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자치와 자연이 각각 대응하는 인간과 사회와 세계가 균질성이나 획일성이 아니라, 보편주의와 다원주의에 의해 항상 움직이는 것임을 뜻한다. 보편주의는 그것이 그 탐구의 ‘출발’점에서 미리 주장되어 타인에게 강요되거나 그 ‘최종’의 목표로 미리 결정되어 그 속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이해하기 위해 공통의 공간을 탐구하는 ‘과정’의 보편주의이기 때문에 언제나 다양하게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이는 상호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보편’을 찾아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인문학과 민주주의에 대하여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독재자나 강력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유교 사상에 수백 년 이상 길들여진 탓으로 반민주주의적인 타율적 통치 사고와 불평등에 젖어 있다. 민족주의 사관이니 신자유주의 사관이니 하고 떠들지만, 사실은 영웅 사관이 유일한 사관이다. 백인-황인-흑인이라는 인종차별 구조의 서열은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세계관이 되어 선진이라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과 후진이나 야만이라는 흑인 혹은 준흑인에 대한 우월감을 낳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서양 중심의 세계 역사관이고 이를 서양은 물론 비서양도 그대로 따랐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한 서양이 서양 중심의 세계사관을 갖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를 비서양, 특히 서양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시대는 물론이고 그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한 나라들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비서양인은 서양 중심의 세계사관을 타파하고 비서양 중심의 세계사관을 수립해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특히 마하트마 간디는 서양 문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인도의 비폭력 전통을 존중했다.
인문에 반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부인하고 인간을 이념이나 집단으로 파악하고 차별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집단주의, 지역주의, 혈통주의, 파벌주의, 차별주의 등이다. 인종과 계급이나 반공과 자본을 인간의 결정 요인으로 보는 파시즘, 제국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상업주의 따위는 그 변태들이다. 이는 인간 행위의 목적을 개인이 아니라 인종과 민족의 승리나 순결, 또는 계급이나 물질이나 소비의 승리와 독재로 보고 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본다. 또한 이는 인간 집단을 선악으로 구별해 백인이나 프롤레타리아는 선하고 비백인이나 부르주아는 악하다는 식으로, 또는 그 반대의 흑백논리에 의해 구분한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의 자율성 확보, 즉 자기표현 가치 증대는 무엇보다도 물질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정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주의,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엘리트 중심의 개인주의와 과학주의에 대한 철저한 도전이어야 한다. 이것이 인문의 핵심이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한 자기표현 가치의 증대를 위해 인문이 필요한 것이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입시 논술이나 취업 준비, CEO 조찬 교양이나 유한부인의 명품 교양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도리어 인문을 죽이는 행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비판적 인문과 인문 비판이다. 그리고 주류 인문에 대항하는 비주류 인문의 수립이다. 그것이 인문의 봄을 되찾는 르네상스다.
인문이란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물질 중심적이고, 사회적 관계의 질이 낮다. 이는 한국의 낮은 행복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한국은 인문의 절대적 빈곤국이다. 과거로 상징되는 사회적 지위나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인문적 추구라는 즐거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그런 정신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인문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와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고, 권위(국가)주의나 투쟁(경쟁)주의나 갈등(계급)주의나 패거리(집단)주의나 전체(획일)주의는 없어져야 한다. 인문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이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



▣ 차례


책머리에 ․ 5


제1부 첫 인문 이야기
제1장 첫 이야기 ․ 13
제2장 첫 사람 이야기 ․ 29
제3장 첫 예술 이야기 ․ 45
제4장 첫 농사 이야기 ․ 61
제5장 첫 인문 이야기 ․ 77
제6장 첫 독재 이야기 ․ 93
제7장 첫 민주 이야기 ․ 109
제8장 첫 붓다 이야기 ․ 125
제9장 첫 제국 이야기 ․ 141
제10장 첫 평화주의자 이야기 ․ 157
제11장 첫 폴리페서, 공자 ․ 173
제12장 첫 권학 ․ 189
제13장 첫 민학 ․ 205
제14장 첫 권예와 민예 ․ 221


제2부 고대 인문 이야기
제1장 그리스 이야기 ․ 239
제2장 그리스의 문학과 신화 이야기 ․ 254
제3장 그리스, 페르시아, 헤로도토스 이야기 ․ 268
제4장 아테네 민주주의 이야기 ․ 284
제5장 소크라테스 이야기 ․ 300
제6장 플라톤 이야기 ․ 315
제7장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 ․ 332
제8장 디오게네스 이야기 ․ 348
제9장 고대 그리스 연극 이야기 ․ 364
제10장 에피쿠로스 이야기 ․ 379
제11장 로마 이야기 ․ 395
제12장 로마인 이야기 ․ 410
제13장 로마의 문학과 예술 이야기 ․ 425
제14장 모세와 유대교 이야기 ․ 442
제15장 예수와 기독교 이야기 ․ 458
제16장 우리의 고대 인문 이야기 ․ 470


참고문헌 ․ 486



▣ 본문 중에서


지금 세계는 그따위 황당무계한 국제법의 차원은 벗어났다고 하지만 국제법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런 구분이 존재한다. 단적인 보기로 우리는 지난 1세기 동안 끊임없이 후진국, 빈곤국, 야만국 등이라는 콤플렉스에 젖어왔고, 서양을 닮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왔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시로 삼은 근대화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구호이고, 그 말이 다르게 변용되었어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얼굴까지 서양인처럼 뜯어고치는 풍조가 어떤 나라보다도 심하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정신의 식민지화, 인문의 빈곤이다. 「첫 이야기」(본문 19~20쪽)


서점과 도서관이 중심이어야 인문이 산다. 인문학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그 인프라가 튼튼해야 한다. 즉, 학교, 서점,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출판사 등이 튼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 모든 것이 약하다. 학교는 많지만 입시 준비만 하고 출판사도 많지만 수험서만 찍어내고, 외국에는 거의 없는 입시학원만이 모든 거리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서점,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은 죽었다. 그러니 인문이 죽었다. 대학의 인문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문이 죽지 않는다. 학교나 대학이 죽는 것이 문제다. 도서관 중심의 교육이 아닌 것이 문제다. 도서관에 수험서만 암기하는 아이들만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런 교육을 교육이라고 하고 있는 정부와 교육자, 학생과 학부모가 문제다. 「첫 인문 이야기」(본문 92쪽)


인문학, 특히 고대사나 종교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이나 기술을 종교나 사상과 대립시키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인류가 역사상 종교를 믿지 않은 것은 극히 최근에 불과하고, 모든 종교는 모두 저세상을 믿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과학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가 꼭 저세상을 믿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나 기독교나 마찬가지다.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다고 기독교가 영혼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저세상은 윤회에 의한 재생이 아니라 저세상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저세상을 말하는 것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나는 저세상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과학과 종교가 무조건 대립되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 붓다 이야기」(136쪽)


한국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 학문 대부분이 그런 수준 이하의, 학문 아닌 무엇이 아닌지 의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니 국어연구원이니 국사편찬위원회니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술원이니 예술원이니 한국연구재단이니 하는 것들도 그런 수준과 관련되지만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교과서, 특히 국정교과서라고 하는 학문적 요약본의 기준이다. 그것을 절대 진리처럼 국민 모두에게 교육하는 것이 한국의 교육이고 한국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 교과서 집필 위원들이야말로 학문의 최고 권위자들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국가가 심사해 임명한다. 그들을 권력의 허수아비나 하인이나 시중꾼이나 노예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들은 엄청난 화를 낼지 모르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수동적이다. 교과서에 실린 글을 최고의 글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글은 기본적으로 권력이 심사해 교과서에 싣기에 최고라고 결정한 것에 불과하다. 「첫 권학」(본문 190~191쪽)


내가 니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보는 책을 쓰자 니체를 전공한 어느 철학 교수가 반론을 썼지만, 굳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그런 찬양 게임에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 전공 철학자들에게 그런 비판은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런 전공자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반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철저히 무시한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책을 힘들게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물론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니체에게 불필요하게 현혹되어 반민주주의자가 되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다. 아니 니체에게 반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책은 몇 권 나오지도 않았는데, 민주주의를 욕한 니체의 책은 그 수백 배를 능가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사실 칸트나 헤겔도 비판해야 한다. 아도르노는 왜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을까? 「그리스, 페르시아, 헤로도토스」(본문 271~272쪽)


도대체 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학문 중의 학문이라는 철학이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철인 왕이라고 자부하는 모든 독재자의 독재를 합리화·정당화·정통화한 플라톤이 2,4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해왔다. 이것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시작과 함께 끝냈어야 할 가공할 반민주적 전통이 아닌가? 이 반민주적 전통이 그토록 오랫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점이나 국가에 따라 몇 십 또는 몇 백 년의 역사를 가진 민주주의가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을 보면, 민주주의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반민주주의 철학자인 플라톤의 주장은 수천 년, 수만 년이나 지속된 수많은 독재자의 지배에 절대적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찬양하는 정치인이나 일반인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플라톤 이야기」(본문 324쪽)


시오노 나나미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유대와 신뢰를 찬양하고, 노예라도 능력자는 출세를 할 수 있었다면서 간디 같은 사람도 식민지 독립이 아니라 제국 유지를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고 하니,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유감을 가졌을지 모른다. 아니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었으니 예수가 그것을 예상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오노 나나미는 기독교 때문에 로마제국이 망했다고 했으니, 예수가 빌라도에게 붙어 로마의 법률가가 되어 이스라엘을 로마와 통합하는 데 노력해야 했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간디나 안중근이 영국이나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은 제국 로마의 참된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독재자 카이사르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에게 가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웅과 제국뿐이다.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야곱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니체 등의 영웅주의와 제국주의뿐이다. 「로마 이야기」(본문 399쪽)


예수는 세계 구원의 사명을 내면세계에서 구했지, 바깥 세계에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제의 폐지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전통 유대교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노예는 노예로서 주인은 주인으로서 그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플라톤, 소크라테스, 공자와 같았다. 로마의 키케로나 세네카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가 아나키스트로서 권력과 부에 저항한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아가 그의 아나키스트적 측면을 볼 때, 노예제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세 사람에 의한 왜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수와 기독교 이야기」(본문 464쪽)



▣ 지은이 소개 _ 박홍규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영국 노팅엄대학 법대·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고베대학·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그동안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내 친구 톨스토이』, 『함석헌과 간디』, 『자유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 시민정치의 오래된 미래』,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독서독인』,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마르틴 부버』, 『이반 일리히』, 『세상을 바꾼 자본』,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예술, 법을 만나다』, 『플라톤 다시 보기』,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
가』, 『윌리엄 모리스 평전』, 『내 친구 빈센트』,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자유인 루쉰』 등을 집필했으며,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 『유토피아』, 『인간의 전환』, 『예술과 기술』, 『절제의 사회』, 『유토피아 이야기』, 『이반 일리히의 유언』, 『학교 없는 사회』, 『자유론』, 『간디 자서전』, 『오리엔탈리즘』, 『사상의 자유의 역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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